정치 세상

<비화>김대중 전 대통령 , 노무현 장례식 때 추도사를 못한 내막

daum an 2009. 11. 30. 21:05

지난 5월 23일, 자살로 삶을 마감한 진보적인 대통령인 노무현의 생애와 사상, 정치적 업적이 재조명되고 있다. 이른바 친노세력들은 정당의 창당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그가 죽음 직전까지 썼던 육필원고가 '진보의 미래'란 서명으로 출간돼 나왔다. 그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의 죽음을 애석해 했던 정치인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의 탄압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 때 추도사를 하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박지원 의원은 이 사실과 관련된 자초지종을 공개했다. 이 내막을 추적해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지난 9월 21일 경남 김해 봉하 마을을 찾았다. 이날 이 여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소에 참배했다. 이 여사는 묘소 앞에서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이 여사가 흘린 눈물은 의미는 미루어 짐작만할 뿐 깊은 뜻은 잘 모른다. 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한 이후 첫 외부로의 외출이었다. 첫 외부행사라는 데 중요한 뜻이 내재되어 있을 것.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지난 8월 18일 서거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의 사망 이후 어떤 자세를 취했을까? 그의 비서실장인 박지원 의원은 지난 6월4일, 자신의 선거구인 전남 목포의 목포대학의 초청강연에서 외부로 노출되지 않았던 내부 이야기를 소상하게 공개했다. “노무현의 죽음과 김대중의 슬픔”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강연문엔 노무현을 잃은 김대중의 슬픈 눈물이 엿보인다.
 
박지원 의원 목포대 강연문
 

▲ 봉하마을회관 분양소에 안치됐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     ©김상문 기자
노무현의 서거에 수백만의 국민이 조문을 하고 온 국민이 슬퍼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은도 누구보다 슬퍼했고 충격이 심했다. 제가 지역구 활동을 하고 있던 목포에서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사실을 전화로 보고 드렸을 때 보도를 보고 알고 있었다며 “너무 슬프고 충격이 크다.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 내린 심정이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즉각 모든 지역일정을 취소하고 상경해 김 전 대통령 내외분과 4시간 이상 추도의 대화를 나누었다.

노무현은 서거 했지만 국민들 마음속에 다시 살았다. 봉하로 몰려드는 끝없는 인파, 서울 등 전국 각지에서 조문하는 국민의 정성과 슬픔, 영결식에 쏟아지는 애도와 분노의 물결, 온 종일 TV에서 눈을 못 떼는 안타까움과 탄식. 우리는 분명 죽어서도 산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라고. 노 전 대통령은 이렇게 괴로워했지만 발인식 내내 V자를 그리던 손녀는 우리에게 ‘할아버지는 승리자였다’라고 말해주고 있다. 정부는 국민장을 하면서도 무엇이 두려워서 ‘서울광장’과 ‘대한문’을 그렇게 막았을까? 영결식이 끝난 지 하루도 안 돼 대한문 시민분향소를 강제로 철거하고, 서울광장을 경찰버스로 다시 막아버렸을까?
모든 국민이 슬픔 중에 방향을 잃고 있는 와중에 한나라당에서는 ‘소요를 염려한다’는 망언을 했다. 마음속으로 염려하면 됐지, 왜 공개적 발언으로 고인과 비통에 잠긴 국민의 마음을 다시 짓밟았는가?

더욱 가관은 김 전 대통령의 추도사 문제였다. 한명숙 국민장장의위원회 공동위원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김 전 대통령의 추도사를 유가족과 장의위원회에서 원하니 부탁드린다’고 말했고, 나는 ‘건강상 어려우실 것 같지만 유가족의 말씀이니 보고 드리겠다’고 답변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민주당의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지만 이번 국민장 기간 중에는 주로 김 전 대통령을 모셨다. 슬픔과 충격으로 김 전 대통령의 기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5월 23일 비보를 듣고 7일 내내 애도하다 지치기를 반복했다.

김 전 대통령은 “나는 노 전 대통령과 민주화 동지이고 민주정부 10년을 함께 한 사람이니 추도사를 하겠다”고 했다. 나는 사전에 ‘5월 28일 오전 11시 서울역 분향소에 김 전 대통령 내외분은 분향과 조문을 위해 간다’고 한명숙 공동위원장에게 통보했고, 김 전 대통령께는 ‘한명숙 공동위원장이 영접을 위해 봉하에서 서울로 온다’는 보고도 했다.

그런데 5월 27일 늦은 밤 한명숙 공동위원장은 “정부측 위원회로부터 ‘위에서 전례가 없고 분란이 염려되어 김 전 대통령의 추도사를 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나는 “전례는 뭐고, 분란이 무슨 분란인가! 한나라당에서는 소요를, 위에서는 분란을 말하는 것을 보면 국민적 애도를 오히려 그런 방향으로 이끄는 음모가 있는 것 아니냐”고 화를 냈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 김 전 대통령은 나에게 전화를 해서 “내일 나는 건강상 서울역 분향소에서 분향과 조문만 하고 귀가 할 테니 집사람과 박 실장이 수고하시는 한명숙 위원장에게 점심이라도 대접하라”고 말했다. 나는 추도사에 대한 보고를 드렸고 김 전 대통령은 ‘그럼 누가 하느냐?’는 등 몇 마디를 묻고 “못하게 하면 안하는 거지”라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인 5월 28일 아침 동교동으로 간 저에게 김 전 대통령은 ‘서울역에서 분향과 조문을 하고 점심을 함께 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노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가니 활력과 생기를 되찾으셨나’하고 생각했다. 김 전 대통령은 서울역 분향소에서 분향과 조문을 마치고 한명숙 공동위원장과 정세균 대표 등 상주들과 인사를 하고 위로 했다. 돌아서자 500여명의 시민과 기자들이 ‘한 말씀 해 달라’며 마이크를 주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두 가지 충격을 주었다. 하나는 용감하고 낙천적이고 굽힐 줄 모르던 분이 서거한 데 대해 뜻밖이고,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또 하나는 전례 없는 대규모 조문 군중이 매일같이 모여든 사실에 대해서 감동을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시청 앞에서 분향하는 것조차 막고 있고, 내가 추도사를 하기로 했는데 정부가 반대해 못하게 됐다. 국민은 지금 민주주의가 엄청나게 후퇴하고 있고, 서민경제가 전례 없이 빈부격차가 강화돼서 어려움 속에 살고 있다. 남북관계가 초긴장상태에 있어 국민은 속수무책으로 슬픈 것이다. 국민은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던 한 분인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바로 우리의 이런 슬픔과 답답함과 절망을 같이 합쳐서 국민이 슬퍼하고 애도하는 것이다. 생전에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정치를 하고, 나라 일을 같이 걱정하고, 북한에 가서 정상회담을 한 관계인 저로서는 상주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여러분께 깊이 감사 드린다”

김 전 대통령은 한명숙 총리, 정세균 대표 등과 점심식사를 하고 동교동으로 귀가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원인에 대해 한겨레신문과 리서치플러스가 5월30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59.3%가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정치보복’이라는데 동의했다. 또한 누가 서거의 책임이 가장 큰가에 대한 중복답변에서 검찰이 56.3%, 언론이 49.1%라고 답변했다. 검찰은 노 전 대통령 본인은 물론 영부인과 아들, 딸, 일가친척과 친지에 측근들까지 먼지털기 식으로 모조리 털었다. 그러면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내용을 미주알고주알 TV 생중계하듯 언론에 공개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의 언론보도를 보면 ‘딸을 구속 하겠다’ ‘영부인을 재소환 하겠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 한다’는 등 강한 압박이 계속됐다. 그러나 정작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까지 뚜렷한 증거를 대지 못했다. 전직 대통령을 400Km가 넘는 거리를 오도록 소환조사 했으면서도 20여 일 동안 증거 하나를 못댄 것이다.
오죽하면 김 전 대통령은도 “노 전 대통령이 겪은 치욕과 좌절, 슬픔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런 결단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겠는가? 노 전 대통령의 서거에 누가 책임이 있는지 국민들이 모두 공감하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민주정부 10년’은 독재와 재벌경제, 남북대결에서 민주주의와 서민경제, 남북 평화협력을 ‘되찾은 10년’이다. 그래서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훌륭한 삶과 유업에 대해서도 말했지만, 대한민국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도 노 전 대통령의 역할이 더욱 필요했다고 말했다.

첫째, 민주화 투쟁과 지난 10년간 노력으로 이루어 놓았던 민주주의가 5공 유신시대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 10년간 민주주의는 반석 위에 올라 있었다고 판단했지만, 현실을 보면 잘못 판단했다’고 했다.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 전 대통령이 말했듯이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이 참으로 맞는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이 더욱 그립다고 했다.

둘째, 서민과 중소기업, 장애인 등 소외계층 보호가 언제보다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 IMF 외환위기 때도 그랬지만 현재의 경제위기에서도 부자정책이 주가 되고 있어서 돈이 위로만 돌고 밑으로는 돌지 않아 경제회복이 더디다는 염려를 했다. 국민장 기간 중에 전국의 조문객이 남자보다는 여자가, 노인보다 젊은이가, 젊은이보다 청소년이, 그리고 장애우가 많다는 것은 국민이 아픔을 갖고도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남북관계가 최악의 순간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두 분의 전직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을 해서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김정일 위원장과 함께 서명해 탄생시켰다. 교류협력을 통해 한반도 평화를 지켰다.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ABKR, 즉 Anything But Kim dae-jung and Rho mu-hyun 대북정책으로 현재의 긴박한 위기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 이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김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마음속의 준비를 했지 않나 생각된다. 그래서 ‘내 몸의 절반이 무너지는’ ‘민주화 동지로서 날개 한 쪽을 잃은’ 등의 표현으로 애도를 했다고 판단된다. 노무현의 죽음, 김대중의 슬픔이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국민과 단결해 김대중-노무현의 시대를 계승해 나가는 것이 민주세력에게 주어진 임무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서민경제, 남북 평화협력의 시대를 되찾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전국에 퍼진 애도의 민심을 알아야 한다. 노무현의 슬픔과 국민의 슬픔이 합쳐진 거대한 물결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민경제, 중소기업 그리고 소외계층을 껴안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인정하고 지킨다고 직접 선언함으로써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를 평화와 교류협력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한다.

대통령이 성공해야 나라가 산다. 대통령이 실패하면 나라가 망한다. “이명박 대통령님! 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나라를 구하는 길은 노무현의 죽음과 김대중의 슬픔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새기고, 이제부터라도 국민의 눈물을 닦아준다면 거기에 정답이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미공개 어록
 
노무현 대통령의 치열했던 삶과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담은 정본 사진집 '사람사는 세상(엮은 이/노무현 재단)'도 발간됐다. 442장의 사진으로 꾸며진 사진집에는 유족이 제공한 유청년 시절 사진, 참모들이 보관하고 있던 재임 당시 사진, 퇴임 뒤 봉하마을에서 찍은 사진 등 모두 100만장에 달하는 사진 가운데 엄선한 것들만 모은 것. 이 책에는 미공개 구술의 어록을 공개했다. 다음은 이 어록이다.

△청문회 스타가 되었을 때 정치를 왜 시작했냐는 물음에 ‘분노 때문에 시작했고 지금도 식지 않아서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어려운 과제는 한국 사회에 있는 ‘증오와 분노’를 해소하는 것이다.(2005년 5월 지인과의 대화)

△정말 무슨 운명이 이렇게 험하죠? 몇 걸음 가다가는 엎어지고… 또 일어서서 몇 걸음 가는가 싶으면 다시 엎어지고… (2004년 3월 12일 탄핵소추안 가결 후 수석보좌관 회의)
△제가 아직 어디 가서 어른 노릇을 못합니다. 밥그릇이 제게 먼저 오면 어색해하죠. 대통령 5년 하는 동안 그래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2008년 5월 지인과의 대화)

△이 아이가 씩씩해요. 개도 잘 만지고 애벌레도 잡아오고 말하자면 겁이 없어요. 아무에게나 말을 잘 걸고, 인사를 잘 합니다. 인사는 3대입니다. 저도 마을에서 인사 잘 하는 아이였습니다. 제 이름을 모르는 분은 ‘왜 그 과수원집에 인사 잘 하는 아이 있잖아’ 했습니다.(2008년 8월 14일 방문객 인사)

△정치 지도자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입장을 밝혀야 한다. 미래를 단정적으로 예측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고 많은 국민들에게 선택의 길을 제시할 수도 없다. 어떤 의미에서 정치인이란 단정해 나가는 직업이다. (2001년 미공개 구술)

△왜 정치를 하는가? 되짚어가다 보면 문득 ‘나도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병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골똘하게 생각을 한다. 쉬는 시간이 생기면 꼭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정치인들이 욕을 먹는 모습을 보며 ‘나는 뭐가 다른가?’하는 것이다. (2001년 미공개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