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넓은 대자연과 신화를 간직한 땅 몽골을 2년 내에 7회를 방문했다.여행이라는 큰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또 다른 투어를 기획하면서 사업을 구상해 본다. 몽골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징키즈칸 이다. 몽골인 들은 징기스칸의 후예로 가장 존경하고 숭배하는 인물이다. 징기스칸 마 동상을 바라보면 몽골인 들의 칸 사랑을 알 수 있다.몽골 7회를 방문하는 동안 올해에는 겨울과 여름을 동시에 느끼게 됐다. 몽골의 여름은 6월이 가장 덥게 느껴졌고 습도가 없기 때문인지 한국의 여름보다 좋은 것 같다. 몽골의 여름은 푸른 초원과 석양 그리고 백야를 볼 수 가 있다.
그렇다면 몽골은 어떠한 나라 일까? 지난 2017년 7월부터 김해공항 에어부산에서 매주 화요일과 금요일 2회 정기운항이 됐다. 몽골과 한국의 시차는 1시간으로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로 갈 때 4시간, 귀국 시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데 이것은 시차 때문 이다.
몽골은 1911년 12월 29일 청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한 후 1924년 11월 26일 몽골 인민 공화국을 수립했다. 1992년 2월 13일 헌법 개정을 통해 국명을 몽골국으로 개칭 했다. 면적은 1,564,116km²으로 몽골 인구는 3,171,065명(2019)으로 몽골인 317만 명 중 280만 명이 수도 울란바트로에 거주하며 평균 임금은 4,097$(2018) 원선 이다. 정치체계는 이원집정부제, 단원제, 다당제, 단일국가로 현재 할트마긴 바트톨가 대통령 (2017년 7월10일 ~),과 오흐나긴 후렐수흐 (Ухнаагийн Хүрэлсүх)총리(2016년7월 7일~)가 집권하고 있다. 민족구성은 몽골인 92%[1], 오이라트인 4%, 카자흐인 4%로 종교분포는 불교 60%, 무속신앙 38.6%, 이슬람교 3% 이다. 화폐단위는 투그릭(төгрөг)을 사용하며 UN은 1961년에 가입했다.
이에 필자는 몽골의 기본 투어 일정과 일반 관광객은 누릴 수 없는 여행기를 기록해 본다. 지난 8월 9일 오전 8시 30분 김해공항을 출발해 11시40분(현지시간 10시40분) 몽골 울란바트로 징기스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일행들은 현지 한국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한 후 자이승 전승탑과 대암 이태준 기념공원을 방문했다.
자이승전승탑은 울란바타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2차 세계 대전 승리를 기념하면서 러시아에서 1971년에 세운 승전 탑이다.
자이승전승탑은 울란바타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세계 제2차 대전 때 러시아 연합군이 일본군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면서 러시아에서 1971년에 세운 승전 탑이다. 정상에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그림으로 모자이크가 원형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수흐바타르 광장(현 징기스칸 광장)에서 남쪽으로 3Km 지점인 자이산 정상에 있는 자이승 전승탑은 울란바트로에 주요 관광지로 꼽히고 있다.전승탑에는 ‘소련사의 기억은 하늘의 태양처럼 영원하고, 대지를 태우는 불처럼 신성하다.’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수많은 계단 길을 올라간 산 정상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을 기념하는 몽-소 우호친선의 상징물인 자이승 전승탑이 웅장하고 높게 서있다.
몽골은 1938년과 1945년 두 차례에 걸쳐서 일본군의 침공을 러시아군과 연합하여 막아냈는데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과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해 혁명 50주년을 맞아 1971년에 소련의 기증으로 전망 좋은 보그드(Bogd)산 정상에 세워져 있다.
이 전승탑의 기원이 된 할힌골 전투(노몬한 전투)는 일본 관동군과 만주군대 소련군과 몽골 연합군간의 전투로 1939년 5월 몽골군이 할하강을 건너오자 일본군은 불법월경으로 간주하여 충돌했는데, 이때 소련이 기계화 부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그러자 일본은 만주에 주둔해 있던 항공과 전차 병력을 총동원하여 대공세를 취하였으나, G.K.주코프가 지휘하는 소련군과 몽골군의 반격으로 참패했는데 사상자가 무려 17,500여명이나 되었고 소련과 몽골군도 18,50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
이 전투에서 많은 몽골과 소련 연합군은 일본군을 포로로 잡아서 국토건설과 건축 공사에 강제노동을 시켰다고 한다.
자이승전승탑은 울란바타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2차 세계 대전 승리를 기념하면서 러시아에서 1971년에 세운 승전 탑이다.
자이승전승탑은 울란바타르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2차 세계 대전 승리를 기념하면서 러시아에서 1971년에 세운 승전 탑이다.
대암 이태준 기념공원과 기념관에 대해 알아봤다.
대암이태준 선생은 그 동안 우리 독립운동사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1980년 우리정부에 의해 건국공로포상이 수여되고,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훈격이 격상되었으나,일반 국민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이름이었다.일제 강점기 조국으로 부터 약 2,000km 떨어진 몽골의 수도 울란바트로에서 항일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몽골 마지막 왕의 어의(御醫)로써 뜨거운 38년의 삶을 살다가신 이태준 선생이 우리의 주목받게 된 것은 199년 3월 한.몽 수교 이후였다.
수교 이후 선생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봉사단,한인회,공동 학술 조사단 등에 의해 이태준 선생의 발자취가 하나둘씩 알려지기 시작했고,몽골 연세친선병원(1994년 건립)원장이자 재몽골 한인 회장을 맡고 있었던 전의철 박사 등 뜻있는 분들의 노력으로 200년 7월 8일 이곳에 기념비와 가묘가 세워졌다.몽골정부가 제공한 2,000평의 부지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총학생회,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및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2001년 7월 19일 기념공원이 준공되었다.공원에는 선생의 가묘,기념비,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팔각정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산책로 등이 꾸며져 있다.
대암 이태준 선생 기념공원
이태준 기념공원은 몽골의 중요한 관광지의 하나인 자이승 전승탑 근처에 위치하여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명소가 되었다.이태준 기념공원을 통해 한국과 몽골의 우호관계는 더욱 깊어 질 것이고,선생의 나라사라의 큰 뜻과 숭고한 박애정신은 오늘날 우리들을 비추어 주는 등불이 될 것이다.
특히,2016년은 양국 관계발전에 매우 중요한 해로 기록될 것이다.당시 에벡도르지 대통령이 5월 한국을 공식방문하였으며 또한 박근혜 대통령도 7월 ASEM정상회의 참석을 계기로 몽골을 공식 방문 했다.불과 2개월 사이에 양국 정상간 이러한 교차 방문은 다른나라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양국관계의 중요성이 더욱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양국은 내실을 다지며 더욱 성숙된동반자 관계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애국지사 대암 이태준(大岩 李泰俊 1883~1921)>
애국지사 대암 이태준(大岩 李泰俊 1883~1921)선생은 항일 애국지사로 조국에서 2,000km 떨어진 몽골의 수도 울란바트로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인물이다.선생의 본관은 인천이며,1883년 11월 23일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1144번지에서 태어났다.어려서는 고향의 서당에서 수학했으며 당시 풍습대로 일찍 결혼해 두딸을 낳았다.하지만 1905년 으사늑약으로 조국이 반식민지 상태가 되고 1906년 부인을 잃자 상경하여 서울역 맞은편 세브란스 병원 앞에 있던 김 형제 상회에 취직했다.이 상회를 운영하던 김필순(金弼淳)은 제중원(세브란스병원)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중이고 도산 안창호(安昌浩)와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안창호등 독립지사들은 이 상회를 비밀 회합 장소로 이용했다.이태준은 1907년 8월1일 일본군에 의한 강제 해산에 맞서 전투를 벌이다 한국 군인들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되는 것을 목격했다.
<의사의 길을 택하다>
이런 영향으로 이태준은 의사가 되기 위해 1907년 10월 1일 세브란스병원 의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 의학교는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중원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올리버 알 에데슨이 교장으로 있었다.1908년 6월 스승이자 동지인 김필순은 졸업해 한국 최초의 의사 7명중 1명이 됐으며,모교에 남아 후학을 가르치면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활발한 할동을 벌였다.의학생 이태준은 1909년 말 안중근의 이토히로부미 암살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1910년 2월에 석방돼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중인 안창호의 권유로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자매단체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입했다.그가 4학년이던 1910년 8월 조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 당했다. 이태준 선생은 1911년 6월 2일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제2회 졸업하고 의술개업인허장 (제92호)을 수여받았다.
<중국으로 망명하다>
이태준은 김필순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왔다.일제는 1911년 말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대량 검거하기 위해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했고 김필순도 검거 대상에 포함됐다. 하는 수 없이 김필순이 먼저 중국으로 망명하기로 했다. 1911년 12월 31일 망명길에 오르는 김필순을 배웅하고 돌아온 이태준은 병원에 두 사람이 망명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는 것을 알게 되자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급히 망명기길에 오르게 된다.이태준은 중국 남경의 '기독회의원'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나라의 독립을 위한 계획을 모색했다.그러던 중 훗날 자신의 처사촌이 도니 애국지사 김규식(김필순의 매제)의 권유로 1914년 몽골의 고륜(庫倫,몽골어로 Huree,러시아로 Urga,혁명후에는 Ulaan-baatar)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몽골에서 활동하다>
까우리(高麗)고려 의사 이태준은 '동의의국'(同義醫局)이라는 이름의 병원을 개설해 화류병 퇴치에 앞장섰다.이태준은 울란바트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졌다.몽골 사람들은 그를 '신인(神人)'혹은 '극락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을 대하듯 했다.마침내 몽골 마지막 왕인 보그드칸 8세의 어의가 됐으며,1919년 7월 '에르데닌오치르'라는 높은 등급의 훈장을 받았다.몽골 사회에서 두터운 신뢰를 쌓은 이태준은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관계를 유지하면서 주요한 비밀 항일 활동에 큰 공적을 남겼다.한인사회당 주도로 소비에트 정부로 부터 확보한 이른바 크민테른 자금 40만 루블(그중 4만 루브르을 이태준이 직접 운송)상당의 금괴 운송에 깊숙히 관여 했다.또한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우수한 폭탄제조자인 마쟈를릏 소개시킴을써 보다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항일 운동이 이루어지는데 큰 역활을 했다.
<안타까운 선생의 최후>
선생의 비극적 최후는 러시아 혁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1921년 2월 러시아 백위파의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미친 남작'운게른(Ungeln Sternberg)이 몽골을 점령했다.이태준 선생은 자신이 주치의로 있던 가오시린 중국군 사령관이 같이 탈출하자는 제의를 거부했다.모스크바 자금의 운송과 마자르를 김원봉에게 소개할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외국인이었음으로 별 일이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하지만 운게른의 부하들은 울란바트르에 거주하는 있던 많은 외국인들을 처형했다.안타깝게도 이태준 선생도 이들 외국인들의 한 명으로 밧줄에 의해 교살됐다.38세의 안타까운 나이였다.선생의 묘는 몽골의 성산(聖山)보그드산 근처에 있다고 한다. 이 기념 공원근처로 추정된다.
첫 투어 일정으로 자이승 전망대와 대암 이태준 기념공원을 방문하고 울란바트로 역으로 향했다.
몽골 현지 여행 전문은 엔조이몽골투어 이연상 대표 (976)9111-1234/070-8692-9001/070-8526-2057로 연락하시면 몽골여행 모든것을 책임지며 무엇보다 관광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대한민국 현지에서는 김욱 대표(010-2807-4242)와 안기한(010-7530-0078) 대표에게 문의하면 자세한 설명과 함께 몽골 기본 투어과 아닌 단독투어 일정으로 고객을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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