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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골제,우리나라 가장 오래된 대규모 제방의 하나다.

daum an 2015. 3. 30. 18:11

 

전북 김제땅을 처음 밟아본다.하늘과 땅이 하나되는 지평선인 이곳.너무나 넓은 평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벽골제에 거대한 담수시설에 놀라웠다.또, 일제강점기의 슬픔 역사에 아퍼 해야만 했다.김제 벽골제 문화단지 정문을 들어서면 벽골장터가 보인다.이 곳은 전북 김제시의 특산물을 관광객들에게 홍보와 판매를 할 수있는 공간이다.문화재 단지 맞은편에는 조정래 아리랑 문학관을 마주하고 있다.

김제 벽골제는 사적 제111호로 지정되어 전북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소재에 위치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대규모 제방의 하나다.벽골제에 대한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 (330)년에 처음 축조돼 제방거리는 "일천팔백보이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제방길이를  3.24km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3.3km라고 대부분 표기하고 있다. 저수지 둘레 40km에 이르는 거대한 저수지로 제방을 훼손코자하는 청룡과 이를 보호하는 백룡이 살았다는 설화가 전래되고 있어 벽골제에는 커다란 벽골제 쌍룡이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야간에는 조명으로 청룡과 백룡을 밝혀 더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이후,벽골제는 통일신라 원성왕6년 (790)에 늘려 제방을 쌓았다.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여러차례 수리하였으나 세종2년(1420)심한 폭우로 부분 유실 된 후 점차 기능을 상실 한 것으로 보여진다.현재 신용리에서 월승리에 이르는 약 3km의 제방과 장생거와 경장거로 추정되는 두 곳의 수문지가 남아있다.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 의해 제방이 농업용 간선수로로 개조되어 이용하다 결정적으로 훼손됐다.용수로의 기능만을 유지하고 원형을 상실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1975년 발굴보고서에는 제방 높이 4.3m,밑면 너비 17.5m,윗변너비는 7.5m로 추정하고 있다.

조선 태종 15년(1415)신덜미산에 세워진 벽골제 중수비는 이후 사적지를 조성 단지내에 옮겨졌다.중수비는 마모가 심하나 신증동국여지승람 김제군조에 중수비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알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장생거 (長生渠)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벽골제는 총 5개의 수문으로 수여거,장생거,중심거,경장거,유통거라고 한다.그 중 현재 제방과 함께 남아있는 수문은 두개소로 장생거와 단지 밖의 벽골제 제방을 따라 남쪽으로 약2km에 위치한 경장거이다.1980년대 수문일부 복원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벽골제중수비의 기록에는 제방의 단면과 수문구조가 기술 되었는데 "둑의 아래 넓이는 70자요,위의 넓이는 30자이며,높이가 17자이다.수문은 마치 구롱(丘壟)처럼 보였다....또 수문양쪽의 석주심(石柱心)이 움푹 들어간 곳에는 느티나무 판을 가로 질러서,내외로 고리와 쇠줄을 달아 나무판을 들어올리면 물이 흐르도록 하였으니,수문의 넓이는 모두가 13자요,돌기둥의 높이는 15자이며,땅속으로 5자나 들어가 있다. 이것이 벽골제의 대략이니 때는 영락(영락)13년 (명의 연호 태종15년,서기1415년)이다...."라고 기재됐다.

이곳 벽골제문화재 단지에는 벽골제장터,농경문화박물관,장생거,벽골재쌍룡,농경사주제관 및 체험관,우도농악관,단아루,벽골제비,벽천미술관,선비문화체험장,전통가옥 숙박체험장,소 테마공원등이 있어 오천년 농경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