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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이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다.

daum an 2014. 5. 2. 17:37

지금 대한민국에 이순신 장군이 계신다면 이라는 글이 SNS 통해 게제됐다.

맹골수도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울돌목 다음으로 조류 강한곳 이다.
맹골수도 孟骨水道·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의 해역으로 울돌목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와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울리 사이에 있는 해협이다.
명량해협은 전남 해남군 화원반도(花源半島)와 진도(珍島) 사이에 있는 해협을 말한다. 

 

▲ 사진=두산백과     © 시사우리신문편집국

이순신 장군( 1545 ~ 1598)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에서 왜적을 물리친 장수이다.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세계인이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충무공 후예라 말 할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기 짝이없다.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류성룡(柳成龍)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밑에서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3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亂中日記)》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李忠武公亂中日記附書簡帖壬辰狀草)》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 충렬사 팔사품(통영 충렬사 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참조항목거북선해진도,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노량해전, 명량대첩, 부산포해전, 안골포해전, 옥포해전, 율포해전, 이억기, 이충무공가승, 난중일기, 아산 이충무공묘, 이충무공실기, 이충무공유사, 이충무공전서, 적진포해전, 한산도대첩, 통영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옥포대첩기념제전, 사천포해전역참조항목거북선, 김만수, 김억추, 나대용, 남망산공원, 남해 충렬사, 녹둔도사건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이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침략에 야망을 품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왜군은 4월 부산성의 함락을 시작으로 하여 제1군, 제2군, 제3군을 편성,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함경도까지 침공하였으나 명나라의 지원과 조선 각 지방의 활발한 의병활동으로 퇴각을 시작하였다. 한편 바다에서는 이순신장군이 한산도대첩, 노량대첩,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각 지방에서 활발하게 의병활동을 한 사람은 곽재우, 조헌, 김천일, 고경명, 정문부 등이 있다. 출처: encyber.com/두산백과
 
세계인이 이순신 장군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렇다.

영국의 해전사 전문가이자 해군중장 G. A. 발라드는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 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고 말했다.이어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고 극찬했다.
 
해군중장 G. A. 발라드는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며"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토마스 브레너는 "나는 35년 동안 역사를 공부했지만 이분에 대해서는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 안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며"나의 아들이 해군인데 그 아이도 이순신을 못들어 봤다고 한다.그래서 아들에게도 이글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명나라 장수 진린, 1598년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전했다.

"고니시, 시마즈 등은 이순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싸우다가 또 패주했다. 이야말로 죽은 제갈(諸葛孔明)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은 것이나 다름없다. 싸움이 그치자 그제야 비로소 이순신의 죽음을 안 진린은 놀라고 배에 엎어지기 세 번이더니 탄식하기를 “실로 그만한 자 고금에 다시 없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킨 그 충렬(忠烈). 조선왕조는 쇠망하기 시작하여 3 백년 뒤 일본에 합병 되었다. 하나, 호걸 이순신의 영명(英名)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다." - 아오야기 난메이(青柳南冥), 《이조사대전(李朝史大全)》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 갔다.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순신장군이 만약 나의 함대를 갖고 있었으면 그는 세계 해상을 지배했을 것이다.

-도고 헤이하치로(東郷平八郎), 1905년 쓰시마 해전 승전 후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당신 나라의 이순신 장군은 나의 스승입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한국의 실업가 이영개에게, 후지이 노부오.

실제로 일본 역사교과서에도 도고 헤이하치로보다 이순신장군이 더 비중있게 소개되고 가르친다.

한산도대첩에서 개 털린 일본 최고의 명장 와키자카의 후손들은 아직도 이순신장군의 탄생일마다 존경의 표시로 한국을 방문한다.

중국의 한 학자 장웨이는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인 북경대 강의에서 거북선을 설명 후, 이순신장군을 찬양한다.

게다가, '만약 청나라때 영웅 한명을 살릴 수 있다면 누구를 살리겠는가'라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진후 학생들이 제갈공명, 한신, 항우 등 당대 최고의 영웅들을 말할때 이 학자는 모두 틀린 대답이다하고'그 영웅은 이순신장군'이라 한다.

만약 이순신장군이 중국에 있었더라면 중국은 지금과는 비교도 안되는 초강대국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직도 전세계 해군 사관학교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전법을 가르친다.

(문화재단이사장의 글에서 인용)

그래서일까? 이 나라 바다는 지금 그 분이 너무도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