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세상

홍준표 Life story

daum an 2012. 12. 19. 17:04

홍준표 Life story

 

 

 

△ 피라미 낚시로 보낸 유년의 강변

 

․1954년 창녕 출생

․유소년기 : 합천, 밤마리 낙동강변에서 성장

․나의 아침 일과, 새벽에 일어나 밤마리 강변에 나가 피라미 한 주전자를 잡는 일

아버지는 피라미회로 아침식사, 나는 8킬로미터 떨어진 학남국민학교로 걸어서 등교

․아버지, 일제시대 한학, 해방이후 한량으로 평생을 보낸 소위 ‘무능력한 가장’

어머니, 달비장수(머리카락 수집상, 가발 수출용), 걸어서 보름동안 서부경남 일대를 돌면서 머리카락 수집, 돌아 오실때면 너무 굶어서 쓰러지셨다.

․나는 어릴 때 몸집이 왜소, 품삯을 받는 들일을 잘 시켜 주지도 않았다.

․10여년뒤 집이 불타 없어져 울산으로 쫒기듯 이사 가기전까지 매년 겪는 낙동강 황톳물 속에서 우리집 유일의 재산인 하천부지가 물속에 잠기는 것을 목격

․보리고개, 봄은 장리쌀을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장리쌀이란, 마을 부잣집에서 양곡 한가마니 빌리고, 추수하면 한가마니 반으로 갚는, 빈농들이 가혹한 폭리를 당하는 보리고개 시대의 대표적인 서민 착취제도

․빈곤의 악순환, 부잣집의 횡포는 나아가 자기집 머슴 부리듯 무상으로 부잣집의 농사일을 거들어 줄 것을 요구, 때로는 아버님 어머님만으로도 모자라 자식들도 머슴처럼 일해 주어야 했다.

․또래 친구집에 가서 머슴처럼 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했다.

5.16직후 고리채 정리조치때, 법에 따라 신고한 부모님이 부자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현장도 생생하게 본 일이 있다.

살길 찾아 대구로 이사, 어머님과 누이들(작은누나 4학년, 여동생 1학년) 과일 노점상

다시 창녕읍으로 이사, 리어카에 이삿짐 싣고 2일 동안 걸어서 이사, 드라마 ‘모래 시계’에서는 이 장면이 달구지를 타고 이사 가는 것으로 묘사

부모님 양은 그릇 장사 실패, 합천 산골로 들어가시고, 남매들만 창녕에서 자취

 

 

 

△ 영남중․고등학교

 

․대구 영남 중학교에 진학한 것은 전적으로 내 고집 탓,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도시에서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 특대생(장학생)

․그 당시 나의 키 124센티

영남중고 6년동안 단한번도 도시락 못 사감. 점심때 수돗가에서 ‘물배’ 채움.

․작은 누나 국졸, 방직공장에 취직, 작은 누나의 희생으로 중․고, 대학 다님.

 

△ 어버지, 어머니

 

․아버지, 한량으로 사시다가 내가 대학다닐 때 작고

․어머니, 국회의원 당선직후 작고

 

△ 고려대학교

 

․71년말, 육군사관학교 특차 시험 합격

․아버지 누명으로 경찰에서 고생, 이사건 직후 법과 대학에 지원하기로 작정, 부랴 부랴 문과공부를 다시 시작, 한달후에 고려대학교 법대 합격

․고려대 입학 1년만에 제적, 밤마리 나루터 뱃사공 보조로 일함. 74년 복학

․74년 밤마리집 화재로 소실, 가족들 울산으로 이사

․아버님은 현대중공업 야간 경비원, 누나와 여동생은 각자 취업전선으로

울산 복산동 단칸 월셋방, 밑바닥 생활은 참으로 비참했다.

1년 후 아버님은 평소 지병으로 작고, 병명도 모르고, 큰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음.

 

 

△ 보리밥과 단팥빵

 

․누나가 공장에서 받는 월급으로 전기세, 수도세, 보리쌀, 내 학용품을 사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보리밥만 먹었다.

점심시간이면 학교 매점에서 단팥빵을 팔았지만 나는 먹어 본 일이 없다.

․내가 지금 뼈가 가늘고 살이 없는 것은 어릴 때 밥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쌀밥만 먹는다. 건강식이라면서 보리밥을 권해도 나는 보리밥에 질려 쌀밥만 먹는다. 빵도 단팥빵만 먹는다.

 

△ 무작정 상경, 입주 가정교사 등으로 고학, 방위병 입대

 

․1972년 2월 24일 대구에서 밤11시 50분 특급열차를 타고 새벽 6시에 서울역 도착

․아버님이 주신 14,000원(하숙비 10,000원)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생활 시작

입학시험 치를 때, 그 전날 올라와서 시험치고 그 이튿날 고속버스 타고 내려 가본 것이 서울 경험의 전부

첫미팅, 대구명문 경북여고 출신 이대 여학생, 내가 대구의 3류 영남고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일어서서 나감. 그 이후로 나는 미팅을 해본 일이 없다.

☞ 당 대표할 때, 이 얘기를 한 것이 소위 “이대 계집애 안 좋아 한다“로 와전됨.

당시 나는 48킬로 남짓되는 왜소한 체구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는 내가 공수 부대원으로 묘사되었으나 사실 방위병 출신

․대학 4학년 봄 신검, 당시 몸무게 46킬로, 시력과 병력이 추가, 4급 판정

․둘다 현역병으로 간 내 아들들은 애비가 고시 합격하고, 법무관으로 제대한 줄로 알고 있다가 방위병 출신임을 알고 무척 실망했다.

 

 

△ 아내

 

․76년 3월초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 창구에 앉아있는 보름달 같은 아가씨

․그 지점에 근무하는 법대 선배의 도움을 받아 10월부터 교제 시작

․당시 나는 46킬로, 아내는 키 156센티에 55킬로, 통통한 체격

․사법시험을 합격하던 해 결혼식, 서로 돈이 없어 내 쪽에서 든 돈은 42만원

․지하 단칸 셋방에서 시작, 사법연수원 2년차일 때 2층의 방 2개짜리로 올라갔다.

 

△ 사법시험

 

․1976년부터 시작된 사법시험에의 도전은 6년이 지난 1982년에 가서야 종료

․계속적인 낙방으로 사실상 포기하고, 군 복무를 마친 후 연합철강에 취직, 회사 총무부에서 주식, 사채, 홍보, 섭외, 인쇄, 방송 등 회사 잡무

․1981년말 사직, 다시 고시공부 시작

․1982년 7월, 시험을 치른 후 낙방을 예감, 한라자원에 취직, 파푸아 뉴기니에서 근무키로 확정후, 사법시험 합격 통보 받음.

 

△ 권력형 비리수사

 

․’88년 10월, 5공비리 수사의 백미였던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 전두환 정권의 실세들이 노태우 정권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그 사건에 연루

․’88년 10월 초, 내가 전격적으로 전두환 대통령 생질을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 여론의 힘을 얻어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 수사 착수

․12월 중순까지 45일간 철야 수사, 전두환 대통령의 큰형 전기환씨가 청와대 민정 수석, 서울시장, 치안본부 간부, 현직고위 법관, 감사원 사무총장 등을 총동원하여 멀쩡하게 잘 운영되던 수산시장을 탈세와 수사로 협박, 강탈했다는 결론

그 사건 수사도중 검찰 고위층은 끝없이 수사중단을 요구, 수사방해, 그러나 언론의 도움으로 나는 사건의 전모를 밝힘.

그러나 나는 사건의 전모를 밝힌 후 좌천, 수사기록은 대검에 빼앗기고, 그 기록을 가져간 대검 중수부는 끈 떨어진 민정수석 한 명만 달랑 집어넣고 사건 종결

․그 사건이후 검찰 내부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낙인 찍힘.

․마지막 슬롯머신사건 수사, 배수의 진을 치고 수사하여 성공, 그러나 그 사건으로 나는 검찰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 드라마 모래시계에 얽힌 이야기

 

․드라마 ‘모래시계’는 나를 스타로 만든 계기

․’93년 3월, 3년간의 준비 끝에 시작된 슬롯머신 사건 7월중순경에 종료

한국사회의 성역을 최초로 타파한 사건이어서 국민들은 통쾌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그 사건으로 나는 검찰 내부의 미움을 받아 사표를 제출하게 됨.

․그 사건을 소재로 드라마를 제작하겠다는 제작진이 나에게 찾아온 것이 그 사건 수사이후 1년이 지난 1994년 여름경이었는데 나는 2~3차례 거절하다가 상부에서 검사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해 준다고 하니 협조를 하라고 해서 협조

그 드라마 제작진은 처음에 최민수씨를 검사로 추천, 나는 최재성씨를 검사로 추천, 결국 박상원씨가 검사역으로 낙점

․‘모래시계’에 나오는 많은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건만 그 후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드라마에 나오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특히 아내는 드라마에서 고현정이 맡았던 역할의 실재 인물이 있었냐고 따졌다.

 

△ 억울한 사표

 

검찰 고위간부의 비리를 파헤쳐 검찰조직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슬롯머신수사 이후 2년 6개월 가량 따돌림을 받다가 검찰을 떠났다.

1995년 10월초 검사를 그만 둘 때 나는 시골로 귀향하고자 했다. 그러나 검사사직 후 조직 폭력배들의 협박 전화가 계속되었다.

․검사가 현직을 버리면 법적보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전직 검사를 보호해 주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

․가족의 안위때문에라도 제도권 재진입의 필요성 절감, 무작정 정치에 입문

 

△ 무작정 도미(渡美), 복귀

 

․1999년 3월,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도중 의원직 사퇴

워싱턴에서 7개월간 체류, 이명박․손학규와의 교분, 그 당시 MB는 선거법위으로 의원직 상실, 손학규는 경기지사 선거 낙선후 워싱턴 체류, 국내 일부 언론에서 우리를 ‘워싱턴 오리알 3인방’이라 지칭

․우리는 워싱턴에서 서울시장, 경기지사, 국회로 복귀를 서로 꿈꾸며 서로 격려, 실제로 그 꿈은 3년 후 모두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