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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국제조사단이 밝힌 천안함 사태의 진실

daum an 2010. 6. 8. 10:18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억측들이 아직도 인터넷과 일부 언론을 통해 나돌고 있다. 우리 군 사상 초유의 충격적인 사건인 데다 각종 추측성 보도와 루머들이 양산되면서 많은 유언비어를 만들어냈다. 시시비비를 가려 천안함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천안함과 함께 서해에서 스러져간 젊은 장병들을 예우하는 길이다. 천안함 사태 관련 의문점에 대한 민군 합동조사단과 해군본부의 답변을 들어봤다.

 

 


A. 북한 잠수정의 침투와 도발 경로는 정확하게 식별되지 않았다. 은밀하게 공격하기 위해 수중으로 서해 외곽을 우회 침투한 것으로 판단된다. 치명적인 공격을 위해 야간에 목표인 천안함에 근접해 어뢰를 발사한 것으로 보이며, 일단 도발한 뒤에는 신속히 현장을 이탈해 침투 경로를 되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A. 잠수함에 대한 방어대책은 대단히 어렵다. 현재 가장 용이한 대응은 잠수함이 기지에 정박해 있을 때 식별하는 것이다. 일단 수중으로 잠항하기 시작하면 세계 어느 나라의 과학기술로도 분명하게 추적하는 것이 제한되는 게 현실이다.
이번에도 북한 잠수함과 잠수정의 기지 이탈은 식별했지만, 우리 영해까지 침범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해 충분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앞으로 취약 수중에 다양한 잠수함 탐지체계들을 구비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계획이다.



A. 현재로선 북한이 사전에 도발 지역을 정찰했다는 정보는 없다. 그러나 천안함 침몰해역과 유사한 북한의 해저에서 사전 훈련을 했다고는 판단하고 있다.



A. 북한 어뢰 CHT-02D 팸플릿은 보안상 출처를 소상히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이 팸플릿에는 어뢰의 제원, 특성, 상세 설계도면까지 자세히 나와 있다.



A. 북한이 해외 수출용으로 건조한 1백30톤의 연어급 잠수정은 보통 경어뢰(길이 2.9미터, 무게 2백80~3백 킬로그램, 지름 12.7인치)를 2발 탑재하고 있다. 하지만 잠수정 외부에 발사관을 부착하면 충분히 중어뢰(길이 7.5미터, 무게 1.7톤, 지름 21인치)를 발사할 수 있다. 우리 해군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A. 어뢰의 종류에 따라 어뢰 내부에 사용되는 부품은 모두 상이할 수 있다. 따라서 어뢰 조립과 정비, 관리를 용이하게 하고 식별하기 쉽도록 그 부위에 ‘1번’이라고 쓴 것으로 보인다. 어뢰 완성품은 알루미늄 외피로 둘러싸여 있어 이 어뢰를 사용하는 북한군은 내부에 글씨가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다른 나라 어뢰는 한글로 ‘1번’이라고 쓰지 않는다. 과거 발견된 북한의 훈련용 어뢰에도 ‘4호’라고 쓰인 한글 표시가 있었다. 따라서 북한제 어뢰라는 증거가 된다.
필적 감정은 글씨가 같거나 적어도 같은 자·모음이 있을 때 가능하다. ‘1번’만으로는 과거 북한의 훈련용 어뢰에 쓰인 글씨와 대조해 필적 감정이 어려운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글씨를 쓰는 데 사용한 잉크는 장시간에 걸쳐 분석하면 동일한 것인지 확인할 수 있으므로 성분 검사를 하고 있다.



A. 추진체 중 강철 부위가 부식된 정도는 천안함 함수가 부식된 정도와 비슷했다. 천안함 함수는 약 한 달 동안 해저에 있었고, 추진체 프로펠러 등은 한 달 반가량 해저에 있어 강철의 부식 정도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강철의 부식 정도와 화약에서 나온 알루미늄의 산화 정도를 보아 천안함 폭발 순간 함께 해저에 가라앉은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추진체 부위 중 스테인리스강은 전혀 부식되지 않았다.
사고 해역에서 발견된 추진체 프로펠러 등에 묻은 흰 물질은 철의 부식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화약에서 나온 알루미늄 성분이 폭발하면서 생긴 흡착물질이다. 흡착물질의 성분은 수분을 제외하면 대부분 알루미늄 산화물이다. 이러한 알루미늄 산화물은 고온, 고압에서 생성되며 수중 폭발이 있었다는 증거다. 최근 들어 어뢰에 사용되는 폭약 가운데 알루미늄 파우더가 20~30퍼센트 포함되며, 특히 버블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알루미늄 흡착물은 프로펠러뿐 아니라 추진체 속 강철에도 부착돼 있었다.


A. ‘결정적인 물증’은 어뢰 가장 뒷부분인 추진 동력부에 해당한다. 구동축과 프로펠러등은 폭약이 실린 어뢰 앞부분과 반대쪽에 있어 어뢰가 수중에서 어떤 각도와 방향으로 터지느냐에 따라 물증이 남을 수 있다.



A. 그동안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천안함 침몰사태 때 물기둥이 발생한 근거는 4가지다. 첫째, 백령도 초병이 해상에서 높이 1백 미터, 폭 20~30미터의 하얀 섬광기둥을 발견했다고 진술했다. 둘째, 천안함의 좌현 견시병이 폭발과 동시에 넘어지며 얼굴에 물방울이 튀었다고 진술했다. 셋째, 천안함 생존 병사들이 탈출할 때 좌현 외벽 부분의 현창과 같은 곳에 물이 고여 발목이 물에 빠졌다고 진술했다. 넷째, 폭약이 폭발한 잔재들이 함수 포탑에서 함미 포탑에 이르기까지 천안함 전 부분에서 검출됐다는 것이다. 이는 폭발 순간 물기둥이 치솟으며 천안함 위로 퍼졌다는 증거다. 이런 정황들을 종합할 때 물기둥이 발생한 결과라고 확인할 수 있었다.



A. 한순간에 두 동강 난 천안함과 가까운 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절단 부위 시뮬레이션을 실시했다. 30가지 조건을 입력해 계산한 결과 가스터빈실 중앙으로부터 좌현 3미터, 수심 6~9미터에서 고성능 폭약 2백50킬로그램 규모의 폭발이 있을 때 천안함과 같은 변형을 일으킨다는 결과를 얻어냈다. 또 폭발 규모를 입력한 선체의 손상 시뮬레이션도 현재 진행 중이다. 선체의 폭발이 어떤 식으로 파괴와 침몰로 이어지는지 공학적으로 계산한 결과 지금까지의 계산만으로도 충분히 천안함 침몰을 설명할 수 있었다.



A. 사건 초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보고를 하다 보니 약간의 혼선이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은폐할 이유는 없다. 합동참모본부는 사건 발생 시간에 대해 맨 처음 해군작전사령부로부터 유선전화로 보고받은 시간인 3월 26일 ‘밤 9시 45분’이라고 언론에 발표했다. 이후 국회 보고와 언론 발표 때 천안함 포술장이 휴대전화로 2함대사령부에 보고한 시간인 ‘밤 9시 30분’으로 정정했다. 천안함 합동조사단은 ‘밤 9시 22분쯤’으로 최종 발표했다.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해군전술지휘통제체계(KNTDS) 화면상 천안함의 자함신호는 밤 9시 21분 57초에 중단됐으며, 백령도 지진파 관측소는 밤 9시 21분 58초에 지진파를 감지했다. 또 천안함 국제상선망 교신시간은 밤 9시 19분 30초~20분 3초였고, 해병6여단 경계근무자 관측 결과 밤 9시 22분 해상 소음을 청취한 것으로 밝혀졌다.



A. 천안함은 지시받은 작전구역에서 정상적으로 기동하고 있었다. 경비함은 지시받은 경비구역을 이탈할 경우 반드시 상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경비구역 내에서는 함장이 판단해 움직인다.
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 천안함은 2함대사령부 지침(2009년 11월 24일자)에 따라 백령도 서남방 지역 경비를 맡았으며, 활동 수역은 암초가 있는 백령도 남방지역으로부터 9, 10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이었다. 특히 천안함 함장은 부임 후 사건 발생지역에서 16회 임무를 수행해 지리에 익숙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사건 발생 당시 천안함의 위치는 수심 24미터로 안전상 문제가 없었고, 사건 발생 전 백령도 남방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북서방향 6.3노트로 정상 기동 중이었다. 천안함은 특수임무를 수행한 것이 아니라 2함대 경비구역에서 정상적인 임무수행 중이었다. 



A. 후타실은 함정의 가장 후미에 있으며, 배의 방향을 잡는 조타장치가 있는 곳이다. 비교적 넓은 곳으로, 평소 헬스 자전거 2대, 윗몸일으키기용 받침대 2개, 역기 4개 등이 비치돼 운동 공간으로 사용됐다. 후타실에서 시신 3구가 나온 것도 조타장치 이상 때문이 아니라 운동 중 사고를 당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침수로 인한 비상상황이라면 비상시 위치가 후타실인 부함장이 후타실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부함장은 침실에서 구조됐다. 그리고 복원된 천안함 폐쇄회로 화면에서도 병사 3명이 운동을 하다 사고를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종된 천안함 수색과 승조원 구조에 나선 해군 구조대원들.
실종된 천안함 수색과 승조원 구조에 나선 해군 구조대원들.




A. 주야간 탐지장비인 TOD는 특정 방위를 지향해 설치돼 있으며, 버튼을 눌러야 녹화된다. 백령도 해병대 초소에서 초병이 3월 26일 밤 “꽝”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방향으로 TOD 방향을 바꿨으나 버튼을 늦게 눌러 폭발 내지 충격 장면은 녹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날 밤 9시 22분 40초부터 함수 부위를 녹화한 장면만 확인됐다.
이후 합동조사단의 조사 과정에서 상급 부대인 6여단에 위치해 있는 영상체계를 점검하던 중 녹화된 ▲천안함 정상 기동 장면(밤 9시02 분 26초부터 3초간) ▲함수, 함미가 분리된 장면(밤 9시 22분 38초부터 1분 1초간) ▲함수 침몰 장면(밤 9시 23분 40초부터 43분 43초간)을 추가로 발견했다.



A. 천안함 신호가 사라진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과정에서 신호 소실 후 6분이 경과됐다. KNTDS의 기계적 특성으로 인해 천안함 소실 후 약 3분이 경과한 시간에 2함대사령부, 백령도, 소청도, 해군작전사령부 등의 KNTDS 근무자 4명이 천안함 소실을 인지했다. 이날 밤 9시 27분쯤 이들 4명 중 ▲2함대사령부 근무자는 백령도 근무자에게 천안함 위치를 송신토록 지시했고 ▲소청도 근무자는 위성통신망을 이용해 천안함을 호출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KNTDS에 관심표적을 지정하고, 관심표적의 정보가 수신되지 않을 때는 경보음이 울리도록 기능을 보완할 예정이다.



A. 구조전력은 당시 상황에서 최단시간 내 현장에 도착했다. 해난구조대(71명)는 사건 발생 33분 만인 3월 26일 밤 9시 55분 비상소집돼 3시간가량 출동 준비 후 버스로 평택까지 이동했고 다음 날 오전 10시쯤 헬기를 이용해 백령도에 도착, 오후 3시부터 구조작업을 시작했다.
소해(掃海·기뢰 등 위험물을 없애는 일) 임무 등을 수행하는 옹진함과 양양함은 진해에 집결 중 임무를 맡자마자 출항해 옹진함은 3월 28일 밤 9시 30분, 양양함은 다음 날 0시 30분 현장에 도착했다.
또 구조함인 광양함은 3월 26일 밤 10시에 즉각 출항해 총 8백64킬로미터의 거리를 최대 속도인 12노트로 운항해 3월 28일 오후 2시 40분 현장에 도착, 구조작업에 투입됐다.
탐색과 구조장비를 갖춘 평택함도 정비를 받던 중 천안함 사고가 나자 정비 일정을 하루 앞당겨 조기 출항해 3월 31일 오전 7시 현장 도착 즉시 임무를 수행했다.



A. 높은 파도 때문에 안전을 위해 고속고무보트(RIB)를 보유한 해양경찰이 천안함 승조원들을 이송했다. 사고 당일 밤 9시 56분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해군 고속정이 천안함 갑판에 집결한 승조원을 구조하려 했으나 천안함의 침수 정도가 심각하고 높은 파도로 접근이 불가능했다. 천안함 승조원들 또한 고속정이 접근하면 충돌해 물에 빠지거나 선체가 급속히 침몰할 것을 우려해 접근을 저지했다.
따라서 고속정은 주변 일대에 서치라이트 탐색을 통해 추락한 승조원이 있는지 등을 확인했으며, 이때 해경정이 도착해 합동으로 구조에 나섰다. 천안함 승조원 58명은 천안함의 구명정(3개)을 이용해 침몰하던 천안함에서 벗어난 다음 해경 RIB를 이용해 해경정에 45명, 고속정에 11명, 관공선에 2명씩 옮겨 타 전원 안전하게 구조됐다. 해군의 신형 함정에는 RIB가 탑재돼 있으며, 앞으로 기존 함정에도 RIB 탑재를 추진할 예정이다. 

 




A. 당시엔 인명 구조가 최우선이었다. 또 해양경찰이 해군으로부터 건네받은 앵커와 부표를 투하했으나 유속이 빨라 유실됐다. 현장 위치를 정확하게 확인하려면 부표를 선체에 묶어 설치해야 하는데 선체가 침몰하는 상황에선 인명 구조가 우선이었다. 현장에 있던 고속정이 직접 천안함에 부표를 설치하려 했으나 높은 파도로 천안함에 접근하지 못했다.



A. 침몰한 천안함 함미는 소해함 도착 전 어선이 어군탐지기로 발견했으며, 이후 소해함이 확인했다. 3월 28일 오후까지 경남 진해에서 출발한 소해함이 사고현장에 도착하지 못했으나 단 일초라도 빨리 침몰한 천안함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했던 해군은 RIB에 로프와 추를 연결해 저인망식 탐색작업을 실시하는 동시에 백령도 어선통제소에 어군탐지기를 보유한 어선의 지원을 요청, 2척을 지원받아 사고해역에 투입했다. 3월 28일 오후 3시 37분쯤 민간 어선(해덕호)으로부터 수중물체 포착 통보를 받았으며, 소해함이 밤 9시 34분 해당 구역에 도착해 음향탐색을 통해 약 한 시간 후 수중물체를 포착했고 소나영상 판독 결과 천안함 함미로 확인했다.



A. 민간 참여와 지원을 마다할 이유가 없고, 해저 환경평가 등 일부 민간 전문기구의 도움이 필요한 분야도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구조능력은 경험과 훈련 정도를 고려할 때 군이 더 적합했다. 특히 45미터 해저 탐색을 위한 스쿠버 역량 면에서 군 전문가와 민간 잠수사의 차이가 현저해 민간 잠수사 보호를 위한 전담인력을 둬야 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양작전에선 외부 인력과 장비를 협조받았다.



A. 장병들에 대한 수영훈련은 수영능력 향상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함정 해상사고 발생에 대비해 생존을 목적으로 양성교육(4주 교육 중 2일 또는 8주 교육 중 4일)과 함정근무 중에 실시하고 있다. 천안함 승조원이 수영을 못해 인명 피해가 발생한 사실이 없다.



A. 사건 발생 직전 함장은 순찰 후 함장실에 도착해 KNTDS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때 폭발음과 함께 넘어져 3, 4초간 의식을 잃고 약 5분간 함장실에 갇혀 있었다. 승조원들이 문을 부수고 함장을 구조한 후 함장이 갑판에 올라와 보니 이미 함미 연돌 뒷부분이 절단돼 보이지 않았다. 함수는 우현 직각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고 좌현 함교 뒤 갑판에 승조원 20여 명이 집결해 있었다.
이후 함장은 이들 20여 명이 각 격실을 수색해 생존자 30여 명을 구조하도록 지휘했으며, 포술장에게 2함대사령부에 피해 상황을 보고하고 구조를 요청토록 했다. 함장은 이날 밤 9시 50분까지 생존자 전원을 외부 갑판으로 이동시켰으며, 이후 매우 조직적이고 질서정연한 가운데 모든 조치를 안전하게 수행했다.
밤 10시 40분쯤 구조함정이 도착하자 함장은 생존자들에게 이함을 지시했고, 잔여 인원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밤 11시 10분쯤 마지막으로 함을 벗어났다. 함장을 포함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극한상황에서도 승조원과 함께 구조활동을 했으며, 함장이 가장 늦게 함을 떠나는 등 끝까지 책임을 다했다.



A. 실종자 가족들의 질문을 받고 수치로 알려드린 것이 해군의 공식 입장으로 오해받게 됐다. 3월 27일 천안함 실종자 가족들이 침몰된 함 내부의 수밀격실 존재 가능성과 수밀격실이 존재한다면 생존 한계시간이 얼마인지 문의해왔다.
이에 2함대 전문장교가 3월 28일 오전 6시 30분 “공기 중 산소의 양이 21퍼센트인데 7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면 위험하다”고 구조상황을 실종자 가족들에게 브리핑했다. 당시 7퍼센트가 될 때까지의 계산은 침수되지 않은 기관부 침실에서 21명이 생존 가능한 시간은 69시간이었다.

천안함 희생자 가족들이 사고해역에 꽃을 던지며 애도하고 있다.
천안함 희생자 가족들이 사고해역에 꽃을 던지며 애도하고 있다.




A. 생존자 58명 중 52명은 국군수도병원에 입원해 가족들과 자유롭게 면회하고 있었으며, 6명은 구조작전을 지원하고 있었다. 작은 불만도 인터넷에 쉽게 올리는 요즘 신세대 장병들의 특성을 고려할 때 입단속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뭔가 숨기려고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생존자들이 해경정에 탑승한 후 천안함 함장은 구조된 승조원들의 심리적 안정과 불필요한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지휘관으로서 기본조사와 같은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당시 생존자들은 자신들만 살아 돌아왔다는 자책감으로 정신적 고통을 받고 있었고, 일정 시간 경과 후 생존자들의 증언도 공개했다. 생존한 생존 장병들은 육체적,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이므로 정상 근무에 조속히 복귀할 수 있도록 필요한 조치들을 해나갈 것이다.



A. 군 병원은 헬기로 1시간 이내에 이송이 가능하고, 이번과 같은 상황에 대비하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 따라서 민간병원보다 군 전문병원이 효율적이다. 일부 장병들은 현지 판단에 따라 백령도 민간병원으로 이송됐다. 이송도 빠르고 긴급상황 대응 시스템도 갖춰진 군병원을 놔두고 민간병원으로 이송한다면 오히려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A. 사건 발생 직후 함대에서 개별적으로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후 함대에서 실종자 명단을 가족들에게 일괄 제공했고 그 명단이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언론보도가 빨라 일부 가족들의 경우 군으로부터 연락을 받기 전 언론보도를 통해 먼저 알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A. 한 준위는 3월 30일 구조작전 때 드라이슈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해군은 2000년부터 상하 일체형 슈트로 잠수복 내 보온용 내복 착용이 가능한 드라이슈트를 도입해 사용했다. 



A. 지진파 정보가 최초로 접수된 것은 사건 발생 이후 9시간 정도 경과한 시점이었다. 당시로선 지진파가 발생한 추정시각보다는 ‘폭발사고’임을 확인해주는 참고자료 정도로 활용됐다. 당시로선 예하부대에서 보고한 천안함 폭발 시간이 신뢰도가 높다고 봤다.
그러나 사건 발생 4, 5일이 경과하면서 사건 발생 시간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자 다른 조사 자료와 함께 지질자원연구원에서 분석한 밤 9시 21분 58초를 사건 발생 시각으로 공식 발표하게 된 것이다.



A. 그런 사실이 없다. 해군은 고 김 원사를 진급자로 확정해 3월 31일자로 진급 발령을 냈다. ‘4월 1일 이전 사망했다는 결론이 나오면 진급을 취소할 수 있다’고 알려진 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행법상 행방불명자의 경우 행방불명된 날로부터 휴직되며, 이후 복직할 때 진급 발령이 보류된다. 그러나 해군은 고 김 원사와 문규석 원사(추서계급)가 생존해 있음을 전제로 구조작전을 펼쳤다. 천안함의 위치가 정확히 확인된 점 등을 고려하여 행방불명자가 아닌 것으로 판단해 이 두 사람에 대해 진급 발령했다.

 

출처:공감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