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무소유’ 를 강조해 온 법정(法頂) 스님이 지난 11일 13시 51분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에서 입적(별세)했다.
법정 스님은 입적하기 전날 밤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라며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속세를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맑고 향기로운 세상’을 구현할 것을 강조한 것.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스님은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수료한 뒤 출가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난 그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전이 되어 포로 송환이 있을 때 남쪽도 북쪽도 마다하고 제3국을 선택, 한반도를 떠나간 사람들 바로 그런 심경이었다.”
출가에 대한 스님의 변이다.
1954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1959년 해인전문강원을 수료하고 비구계를 수지했다.
그 뒤 스님은 <불교사전> 편찬 작업,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등 불교계 언론과 출판 분야에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1970년 초반 대한불교신문(현 불교신문의 전신) 논설위원과 주필을 맡아 날카로운 필력을 드러냈다. 1972년 첫 에세이 집 <영혼의 모음>은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법정스님의 일화 중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유신철폐 개헌서명운동에 참여, 당시 기관원에 의해 감시당한 일화도 유명하다. 이때 기관원 소속 직원들이 절에 살다시피 하면서 감시는 물론 툭하면 연행해 갔다는 것.
“피해자 처지에서 군사독재 당사자들을 향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게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스님은 핍박을 받는 처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위기에 봉착하자 41명의 혁신계 인사와 언론인·교수·학생 등이 인민혁명당을 결성하여 국가전복을 도모했다고 조작 발표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1972년 12월 독재 정권 연장을 위한 유신 헌법이 발효된다.
이에 학생, 시민, 민주계 인사 등의 유신 철폐 개헌 서명 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스님도 뜻을 함께 했다.
그러자 독재 정권은 또다시 1975년, 이른바 제2 인혁당 사건(일명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불리는 정치 조작극을 벌인다.
도예종 등 사회주의 성향을 보이는 한 무리의 인사들을 또 다시 국가전복 기도 혐의로 구속, 재판에 회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형이 언도되고 그에 대한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채 20시간도 지나지 않은 바로 그 이튿날 8명 전원을 사형시키는 사법사상 유래가 없었던 만행을 저지른다. 이를 목격한 법정 스님은 큰 충격을 받았다.
“죄 없는 그들을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이 없다고 자책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독재자들에게 조작극이라고 가장 아픈 곳을 찌르자, 보란 듯이 서둘러 사형을 집행한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생때같은 젊은이들을 하루아침에 죽게 만든 이와 같은 반체제운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법정 스님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산으로 들어가신 까닭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는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선 수행에 도움이 안 되겠구나’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롭고. 중노릇하는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본래 자리로 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무슨 운동이든지 개인 인격형성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도 어떤 이유로 출가수행자가 되었는가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이웃에 불이 났을 때 소방관이고 누구고 할 것 없이 모두 나와서 급한 불을 꺼야 한다. 하지만 일단 불이 잡힌 뒤에는 각자 원위치로 돌아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다해야 한다.”
75년 10월 스님은 거듭 털고 일어서는 각오로 미련 없이 서울을 등지고 송광사로 돌아갔다.
이후 부도만 남아있던 불일암 터에서 법정스님은 토굴을 다시 짓고 철저한 자기 질서 속에 독서와 수행에 힘썼다.
이 무렵인 1976년 발간된 저서가 바로 <무소유>다.
1984년 스님은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는다. 4박 5일 일정으로 수련생들이 1080배를 하게 하고, 윤좌 모임을 열어 참선 실수실참을 하게끔 매년 여름 실시되던 여름 선 수련회 기틀을 잡았다.
매년 7월과 8월 두 달간 열리는 수련회 연 참가 인원은 평균 500여 명으로 불자는 물론 타종교인들에게까지 큰 호응 얻었다는 게 불교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특히 송광사 수련회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뒤 웬만한 큰 사찰들은 거의 여름철 선 수련회를 실시할 정도로 반향을 일으켰다는 후문이다.
1992년 스님은 다시 한 번 버리고 떠난다. 17년 간이나 살았던 정든 불일암을 뒤로 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1993년 7월 연꽃이 불교를 상징하는 꽃이라는 까닭 하나만으로 독립기념관, 경복궁, 창덕궁 연못의 연꽃을 모두 없어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다시 한 번 세속 일에 관여하게 된다.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두루 맑고 향기롭게 가꾸면서 살아가자는 순수 시민운동을 주창하기 시작한 것.
법정스님은 그해 8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준비 모임’을 발족하고 이듬해 1월에는 연꽃을 로고로 한 스티커 10만장을 무료 배포, 서울과 부산 이어 대구, 광주, 경남, 대전 등지에서 대중 강연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이 17년간 이어져 왔다.
법정 스님의 이 같은 발자취에 따라 오늘날 대중들은 법정 스님을 무소유(無所有)를 몸소 실천한 스님으로,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펼치는 불교계의 어른 스님으로, 주옥같은 글로 대중을 감동시키는 온 국민의 스승으로 기억하고 있다.
특히 법정스님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무소유’다.
이와 관련 법정 스님은 생전에 무소유에 대해 “우리는 필요에 따라 소유한다. 하지만 그 소유 때문에 마음이 쓰이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갖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에 얽매이는 일, 그러므로 많이 가지면 그만큼 많이 얽매이는 것. 무소유는 단순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을 뜻한다”고 정의한 바 있다.
세속 명리와 번잡함을 싫어했던 법정 스님은 송광사 불일암 이래 최근까지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은둔하는 삶을 살아왔다.
법정스님의 지인들이 현재도 “법정스님은 수많은 상좌와 지인들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홀로 땔감을 구하고 밭을 일구시며 청빈을 실천해왔다”고 회고하고 있는 것 역시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출처:브레이크뉴스 문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