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세상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

daum an 2010. 2. 27. 23:55

▲ 최경환   

저는 1999년 말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작년 8월 김대중 대통령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10여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님을 보좌했습니다. 저에게는 영광의 시간이었고, 배움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동구 산수동 5거리, 북구 말바우 시장에서 자랐습니다. 산수동 5거리 살 때는 농장다리가 있었고, 그 옆에 형무소가 있었고, 신법원이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요즘 말바우 시장은 광주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인 것 같은데 제가 그곳에 살 때는 광주 변두리나 담양에서 아주머니들이 텃밭에서 기른 상추, 토란대, 감자, 고구마 등을 가지고 와서 거리에서 좌판을 벌이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곳 서구의 모습입니다. 대통령님 따라서 세계 여러 도시를 다녀봤습니다만, 이곳 서구는 확 뚫린 도로, 아파트, 지하철, 공원, 김대중컨벤션센터 등 도시가 잘 정비돼 있습니다. 왜 서구를 ‘행복서구’라 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대통령님 모시면서 청와대에서 일할 때 보면 일 잘하는 지방자치단체장, 즉 구청장, 군수, 시장님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이디어가 많다는 것이고, 둘째는 추진력입니다. 지방행정이라는 게 예산은 정해져 있고, 구청 공무원들 월급 주기 바쁘고, 이말저말 말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필요한 게 단체장의 아이디어이고 추진력입니다. 지금 서구를 이렇게 ‘행복서구’로 만든 것은 전주언 청장님의 넘치는 아이디어와 추진력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앙부처 평가에서 60여차례 상을 받고 상금만 해도 36억원이 달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서구는 전국에서 가장 돈이 많고 큰 지방자치단체는 아니지만 가장 아름답고 가장 행복한 지방자치단체라고 생각합니다.
 
이희호 여사의 ‘건강비결 3가지’
 
오늘 이 자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이나 사상을 배우는 자리는 아닙니다. 주어진 주제에 맞추어 김대중 대통령님과 이희호 여사님의 삶과 생활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지 알아보는 시간입니다. 김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고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위대한 정치인입니다. 이곳 전라도가 낳은 세계적인 지도자입니다. 이러한 분의 생활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런 강연은 이 자리가 처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번 강연을 앞두고 이희호 여사님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번에 광주 서구청에서 강연을 하는데 여사님의 건강 비결 3가지만 알려주세요.”
 
이희호 여사님은 1922년생으로 나이가 89세, 내년이면 90세입니다. 돌아가신 대통령님 보다 두 살이 많습니다. 여사님은 이달 초에는 비행기를 타고 여수에 내려와서 교회에서 간증집회도 참석하고 연설도 하시고, 이번 설을 앞두고는 떡국을 퍼서 나눠주는 봉사활동에도 참석했습니다. 그 연세에 참으로 놀라울 만큼 건강이 좋습니다. 이희호 여사님은 올해부터 한달에 한번씩 힘들게 사는 어려운 분들을 찾아가 격려하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최근 김대중평화센터 회의에서도 “남은 여생을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앞의 제 물음에 여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규칙적인 생활, 둘째는 적게 먹는 것(소식), 셋째는 마음을 편히 갖는 것.” 이렇게 3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규칙적인 생활을 합니다. 자신이 생활에서 지킨 원칙과 규율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분입니다. 그러시면서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비결은 무엇보다도 마음을 편히 갖는 것에 있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건강 비결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희호 여사를 ‘골격미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자세가 바르고 골격이 튼튼하다는 뜻입니다. 여사님과 악수를 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여사님은 상대방 손을 아플 정도로 꽉 잡습니다. 반면, 김 대통령은 너무 손이 부드럽습니다. 청와대 계실 때 수백명과 악수 접견을 하는데 비서들이 접견자들에게 대통령님 손을 가볍게 잡아달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대통령님 손이 워낙 부드럽고 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사님은 다릅니다.
여사님의 생활 태도 중 놀라운 것은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절대 눕거나 허리를 어디에 기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세가 바르다는 것입니다. 공식 석상에서 1-2시간 자리에 앉아 있어도 절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대는 일이 없습니다. 꼿꼿하게 앉아 계십니다.
 
건강의 비결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데 있습니다. 김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 대통령은 유명한 ‘낙천주의자’였습니다. 수많은 선거를 치르고, 인생에서 다섯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닥쳐온 문제를 처리하는데 낙천적인 사고를 가졌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여러 사람의 의견도 듣고 해결방도를 찾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한번 결정이 되고 나면 그대로 밀고 나갔습니다. 결정을 뒤돌아보거나 마음에 두고 애를 태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일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잠을 잘 자고 밥을 잘 먹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해 미움의 감정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설령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잘못을 했다하더라도 용서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편안한 마음,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와 결혼
 
김대중 대통령께서 1962년 이희호 여사와 결혼할 때 이야기입니다. 김 대통령은 미국 유학을 갔다가 돌아온 이희호 여사를 명동인가, 종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에 앞서 한국전쟁 때 부산 피난 시절에 젊은이들의 공부모임에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뒤 김 대통령이 이희호 여사를 서울에서 만났을 때 당시 김 대통령은 국회의원에 여러차례 떨어지고 부인과 사별하고 5.16쿠데타로 정치활동도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김 대통령은 보고 ‘저 사람을 한번 도와야겠구나’하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 당시 이 여사는 YWCA 총무를 하고 있었는데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하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희호 여사는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까지 갖다온 아주 촉망받는 여성운동의 지도자였습니다.
 
김대중도서관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이희호 여사와의 결혼반지가 전시돼 있습니다. 백금반지입니다. 여사님께 ‘결혼 반지는 누가 어떻게 구입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여사님은 ‘제가 두 개 다 샀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이렇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김 대통령에게 시집가겠다는 것은 오로지 이희호 여사의 뜻이었습니다. 결혼 후 이 여사는 국회의원 부인, 야당 당수 부인으로 영광의 시절도 있었지만 감옥 수발, 망명객의 아내, 사형수의 아내로 겪어할 고통에 비하면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현충원 묘역 화재사건, 나라의 수치
 
김 대통령은 대통령직에 물러난 해 2003년 5월부터 신장혈액투석을 받았습니다. 재임중인 마지막해인 2002년에도 몇 차례 병원에 입원하고 혈액투석을 받아야 한다는 의사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대통령이 누워있으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며 치료를 미뤘습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6년 4개월 정도 투석치료를 한 것입니다. 투석치료란 사람의 신장기능이 떨어져 모든 몸의 피를 뽑아내 기계에 넣어 피속의 노폐물을 걸러내고 몸속에 피를 다시 넣어주는 것입니다. 투석치료는 참으로 힘듭니다. 하루에 4-5시간, 일주일에 월 수 금 3번 이렇게 치료를 받았습니다. 치료가 끝나면 대통령님은 힘이 다 빠지고 말소리도 약해집니다. 해외에 나갈 때도 먼저 병원을 예약하는 일이 우선이었습니다.
 
젊은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나이 드신 분들의 투석치료는 5년이 고비라고 합니다. 피를 빼고 집어넣는 혈관에 문제가 생긴다고 합니다. 김 대통령께서도 투석치료 5년이 된 2008년 봄 입원해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결과 모든 것이 좋다는 결과를 받고 저희들이 축하해 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로 1년 반 정도 지나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현충원에서 화재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대통령을 지내고 노벨평화상을 받은, 이미 돌아가신 분의 묘역에 불을 지른다는 것은 인륜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또 거기에는 수만명이 참배를 했고, 여러나라의 전현직 대통령이나 수상, 예를 들면 동티모르의 라모스 대통령, 일본의 모리 전총리 등이 참배한 곳입니다. 거기에다 방화를 하는 것은 나라의 수치입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에게는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2월 2일 그날 아침에 이 여사님께서 현충원에 참배가는 날인데 현장에서는 놀라실까봐 말씀드리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 오후에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습니다. 여사님은 ‘살아계셨을 때도 집앞에 와서 데모하고 소리치더니 돌아가셔서까지 이렇게 해야 되느냐’며 걱정하셨습니다.
 
그날 화재는 방화가 분명합니다. 경찰도 그렇게 발표했습니다. 한적한 아침 시간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고 합니다. 겨울이라 땅과 잔디가 축축해서 크게 번지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 보수단체 명의의 유인물이 발견되고 해서 경찰이 수사하고 있는데 범인을 잡아서 일벌백계해야 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이 사건을 유야무야하면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살아계셨을 때 보수단체 사람들이 일당을 주고 할아버지, 할머니 노인분들을 동원해서 동교동 집 앞에서 북치고 고함지르고 데모를 했습니다. 가장 힘들 때가 대통령께서 투석치료를 받고 있을 땝니다. 동교동 2층 치료실과 데모하는 곳까지는 20,30m밖에 안됩니다. 창문을 모두 굳게 닫아도 그 소리는 다 들립니다. 정말 분통터지는 일이었습니다. 진료방해고, 인권유린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분들은 무슨 생각을 가진 분들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화재사건 후 이희호 여사님은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지켜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성품
 
10여년 동안 김대중 대통령을 모시면서 살펴본 김 대통령의 성품은 아주 여성적이라는 것입니다. 섬세하고 부드럽고 심지어 부끄러움을 타기까지 합니다. 어떻게 저런 분이 험한 정치세계를 뚫고 왔을까 할 정도로 여성적인 면이 있습니다. 어떤 외국분이 김 대통령을 이렇게 평가를 했는데 저도 동감합니다.
 
“김 대통령은 휴머니스트적인 감성과 정치인으로서 용기를 갖춘 독특한 성품을 가졌다.”
 
일반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을 가진 분은 용기가 부족하고, 성격이 활달한 분은 부드러운 성품을 갖는 것을 보기 힘든데, 김 대통령은 양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독특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김 대통령은 ‘눈물의 정치인’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1973년 8월 일본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납치되어 토막살해의 위기, 현해탄 바다 위에서 수장의 위기를 넘기고 5일만에 동교동 자택 골목에 내버려졌습니다. 집으로 들어온 김 대통령은 죽음의 막다른 곳까지 갔다온 회환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에게 잡혀가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김대중을 석방하라’를 외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감옥에서 뒤늦게 알고 펑펑 눈물을 흘리며 정신을 잃기까지 했습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1987년 9월 16년만에 광주를 방문하고 망월동 묘지에서 유족들을 끌어안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읽으며 당시 IMF 외환위기로 국민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말하는 대목에서 잠시 울먹였습니다. 돌아가시던 해인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의 영결식에 참석해 권양숙 여사의 손목을 붙들고 오열했습니다.
 
이때를 생각하면 참 아쉽고 안타까운 심정입니다. 이날 우리는 장례위원회 측에 요청을 했습니다. ‘유족들도 많이 지쳐있고, 김 대통령을 비롯해 연로한 분들이 많으니 햇볕을 가리는 차양을 치는 게 어떻겠느냐’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전례도 없고, 방송 중계에 방해가 된다’며 요청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경복궁 담벼락에 앰블런스와 의료진을 대기시켜 놓고 대통령께서 힘들어하시면 바로 병원이나 사저로 모시고 올 계획까지 세워두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2시간 동안 뙤약볕에 있어야 했습니다. 몸은 햇볕을 받아 힘들고 노 대통령 서거에 마음이 아픈 김 대통령은 권양숙 여사를 보자 여러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오열을 한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며칠 후 “그때 힘들었다”며 2시간 동안 뙤약볕에서 상황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뒤로 김 대통령은 급격히 몸이 쇠약해지셨고 3개월이 지나지 못해 입원했습니다.
 
김 대통령의 눈물에는 자신이 받았던, 그리고 자신과 함께 국민들이 함께 받았던 고통의 한이 서려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감당하기 힘든 고통, 자신을 지지해주고,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의 고통, 동지를 억울하게 잃은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김 대통령의 눈물에는 가식이 없었습니다. 김 대통령의 눈물은 성품이고 진실된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눈물의 정치인’이었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역사와 국민 앞에서 자신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소명을 다시 확인하고 용기를 키워갔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성품
 
이희호 여사는 대학시절 연극반 활동을 했습니다. 이 여사는 <이수일과 심순애> 연극을 할 때는 이수일 역할을 맡아 했고, 군복바지를 입고 호국단 활동을 하며 구령을 붙이고 활동하는 남성적인 면을 보여주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입곤 하는 ‘밀리터리 룩’ 패션의 선구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주위에서 ‘다스’(독일어로 ‘중성’이라는 뜻)라는 별명을 붙여주기까지 했습니다.
 
지난 8월 국장 때 이희호 여사의 서울 시청앞 연설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놀랐습니다. 장례기간 내내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분이 어떻게 저렇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의연하게 말씀할 수 있는지 모두 놀랐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켜본 이희호 여사를 아는 분들은 ‘이 여사의 본모습이 나왔다’라고 말했습니다.
 
김 대통령이 야당시절 때는 동교동 집은 하루에도 수백명이 드나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 민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분들을 안내하고 차와 식사를 접대하는 일은 모두 이 여사 몫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 감옥에 있을 때는 가족들과 측근 비서들을 이끌고 김 대통령을 대신해 동교동을 이끌었습니다. 이 여사에게는 이런 당당함과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품성이 있습니다. 간혹 여성운동 하는 분들이 김 대통령이 1998년 대통령에 취임하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국민의 정부의 절반은 이희호 여사의 몫이다.”
 
이 여사가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을 만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김 대통령이 사형수로 있다가 무기로 감형됐을 때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 2시간 남짓 이야기를 했답니다. 당시 전두환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남편을 죽이려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이 여사는 전두환을 만나 남편을 석방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자서전 <동행>에서 전두환 대통령에게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자신이 사형을 시키려고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대했다. 때로는 바지 자락을 올리고 다리를 긁적거렸다. 독특한 분이었다.”
 
이 여사는 이렇게 당당하고 용기 있는 분입니다.
 
온도차이
 
김 대통령과 이 여사 사이에 넘기 어려운 차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온도 차이입니다. 김 대통령은 추운 것을 싫어하고 따뜻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이 여사는 서늘한 것을 좋아하고 더운 것을 싫어했습니다. 부부 사이에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 침대에 잘 때도 대통령님은 이불을 덮고 자는데 이 여사는 그냥 덮는 이불 없이 잤다고 합니다. 한 침대에 자면서도 각방 쓰는 격이었습니다.
 
청와대에 있을 때 경호원들이 대통령님의 온도(24~25도)에 온도를 맞추면 여사님은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립니다. 대통령님은 에어컨을 지독히 싫어해 에어컨을 끄면 여사님은 덥다며 에어컨을 켭니다. KTX를 타고 광주를 내려오시거나 할 때면 경호원들이 차안의 에어컨 바람 나오는 곳을 전부 테이프로 막아야 했습니다.
 
또 하나 차이는 종교입니다. 김 대통령은 이 여사와 결혼 전에 카톨릭 신앙을 가졌습니다. 토마스 모어가 세례명입니다. 이 여사는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이 여사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김 대통령과 이 여사는 이렇게 차이가 있었지만 이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의 취향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5가지 생활습관
 
김 대통령의 생활습관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절약입니다. 김 대통령은 티슈 휴지도 꼭 반으로 잘라서 씁니다. 수돗물도 꼭 잠가둬야 합니다. 이 버릇은 하의도와 목포의 어린 시절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의도에 물이 귀해서 물지게를 졌다고 합니다. 목포에서도 학교를 다녀오면 물지게를 졌다고 합니다. 물이 귀한 것을 아는 분입니다. 이희호 여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님이 없는데 현관이나 응접실에 불이 켜져 있으면 비서들이 꾸중을 듣습니다. 김 대통령은 총무비서관에게 “퍼주는 것은 좋지만 곳간이 새도록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남에게는 인색하면서도 자신의 생활에는 사치하는 사람을 간혹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남들에게 베풀지도 모르고 동시에 곳간이 새는 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일기를 쓰는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매일매일 자신이 한 일과 생각을 적었습니다. 김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오늘을 날씨가 춥다. 그러나 일기는 화창하다. 점심 먹고 아내와 같이 한강변을 드라이브했다.”(2009년 1월 11일) “하루종일 아내와 같이 집에서 지냈다. 둘이 있는 것이 기쁘다.”(2009년 2월 7일)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이 생활과 느낌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많은 내용을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루에 한 줄이라도 적는 버릇을 갖게 되면 인생을 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기를 쓰는 시간은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입니다. 자신의 얼굴을 거울에 비춰보는 시간입니다. 가족들과 아는 사람들, 세상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셋째, 책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새로운 지식과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열심이었습니다. 젊은이들의 감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젊은 사람도 낡은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은 늙은이와 같고, 나이든 사람도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청년과 같다”고 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만화책도, 소설책도 있습니다. 책은 많이 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책을 읽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상 책을 옆에 두고 틈틈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과 함께 신문과 잡지도 읽고, 방송 뉴스도 보아야 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도 알아야 합니다.
 
넷째, 긍정적인 면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김 대통령에게 독특한 생활의 지혜가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흰 종이를 앞에 펼쳐놓고 가운데에 위 아래로 줄을 그은 다음, 한 쪽에는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부정적인 면, 나쁜 점을 적고, 다른 한 쪽에는 긍정적인 면, 좋은 점을 적어보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어려움에 닥치면 어렵고 힘든 점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주위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 부정적이고 나쁘게만 보입니다. 때로는 왜 나한테만 이런 불행한 일이 오는지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이를 앞에 놓고 막상 적어보면 그런 상황에서도 의외로 좋은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마지막 일기>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불행을 세자면 한이 없다. 행복을 세어도 한이 없다. 인생은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도전과 응전관계다. 어느 쪽을 택하느냐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좌우할 것이다.”(2009년 5월 2일자 일기)
 
김 대통령은 핍박 받는 연금생활, 망명생활 중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흰 종이에 글로 적어보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해보니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좋은 점들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연금과 망명의 고통 속에 있지만, 아내가 옆에서 도와주고 있고, 가족들이 건강하고 나를 이해하고 있고, 국내에는 동지들이 있고, 해외에는 나를 성원하는 친구들이 있고, 국민들이 나를 성원하고 있고, 나는 아직 건강하고... 이렇게 셀 수 없이 좋은 점들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김 대통령은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긍정의 힘을 믿은 것입니다.
 
다섯째, 가족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아무리 바빠도 가족식사나 가족 기도모임을 자주 가졌습니다. 김 대통령은 자신의 평생의 좌우명은 ‘행동하는 양심’이었습니다. 김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산다는 것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 형제, 부모, 이웃을 마음으로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할 일이 있으면 기꺼이 하는 것, 그것이 ‘행동하는 양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말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자신을 고난 속에서 지켜준 것을 4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가톨릭신자로서 신앙, 둘째는 ‘정의는 반드시 국민과 역사 속에서 승리한다’는 역사관, 셋째는 ‘무엇이 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인생관, 넷째는 가족의 이해와 사랑이었습니다. 정치도 가족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아무리 많은 돈을 벌어도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부모, 형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내외분의 생활을 몇 가지 소개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편히 가져야 합니다. 애태우며 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사람들과 갈등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린 다섯 가지 김 대통령의 생활습관, 즉 절약하는 생활, 일기를 쓰는 것,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 긍정의 힘을 믿는 것, 가족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김 대통령은 이곳 호남이 낳은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분은 가셨지만 지금도 그 정신은 살아있습니다. 역사가 흐를수록 김 대통령은 더욱 빛이 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김 대통령의 정신과 뜻을 이어가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 이 글은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이 지난 2월 24일 광주 서구청 행복서구아카데미에서 행한 강연문의 전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
이희호 여사의 ‘건강비결 3가지’
 
최경환 DJ공보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