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지 30주년이 되는 날. 박정희, 그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의해 살해됐다. 그 표면적 이유는 장기독재로 인한 정치적 갈등에 따른 후유증이다. 하지만 핵무기 제조를 추진하다가 사망했다는 의혹이 계속해서 있어왔다. 마찬가지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진보주의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핵무기 제조를 암암리 추진하다가 IAEA(국제원자력기구, International Atomic Energy Agency)의 강력한 감시를받았다. 노무현도 핵무기 제조에 강한 집착이 있었던 것. 이로 인해 IAEA는 지금도 한국이 핵무기의 제조를 추진하는지에 대해, 두 눈 부릅뜨고 감시하고 있을 것. 자주국방을 위해 핵무기를 만들려했던 박정희-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도를 재조명해본다.
세계 여러 국가들은 왜 핵무기 보유에 집착하는가? 프랑스도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으면서 핵무기를 갖게 됐었다. 중국도 지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를 보유했다. 인도도 핵실험을 강행, 핵을 보유했다. 1998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핵무기 실험에 성공,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 적이 있다. 그런데 한국은 왜 아직까지도 핵무기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 핵무기 만들다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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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75년 6월 26일자 워싱턴포스트지와의 회견에서 "미국의 핵우산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핵무기의 개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고 피력했다. 그 후 비밀리 핵무기 개발이 본격화된 것은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주한미군을 완전히 철수한다는 정책을 추진한 시기(1977∼1979년)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미군이 한반도에서 빠져나갔을 때의 군사적 공백을 핵무기로 막아보려는 자위 수단에서였다. 그는 1977년 5월 20일 청와대 출입 기자들과의 비공개 간담회 석상에서 "우리가 핵무기를 만들 능력은 있다. 이번에 하비브가 오면 핵을 가지고 갈 것인지를 분명히 따지고 핵을 거둬간다면 우리가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을 말을 이유가 없다고 말하겠다"는 발언을 했다. 청와대 공보비서관으로 일했던 선우연은 "박 대통령이 1981년 전반기에 핵폭탄이 완성된다"고 말하면서 그해 10월 1일 국군의 날에 원자탄을 세계 앞에 공개하고 그 자리에서 대통령 사퇴 성명을 내겠다는 것을 피력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박 대통령은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세계를 움직이는 선진국이라는 점 때문에 우리나라가 세계 앞에 힘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지 핵무기를 소유해야 한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위해 그는 1976년 12월 1일 한국 핵연료 개발공단을 만들어 실험용 원자로를 통한 핵분열 물질의 생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가 하면 원자탄의 운반 수단인 미사일의 개발에 착수, 1978년 8월 26일에는 중거리 유도탄(사정거리 1백 5Km)을 국방과학연구소팀이 개발, 시험에 성공했다.
미사일 발사 시험을 한다고 했을 때 미국 측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기술 수준으로 봐 가까운 사정거리 정도의 미사일도 못 만들 것이라고 과소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장거리 미사일의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은 한국의 기술 수준에 놀라 핵무기 개발에 급제동을 걸었다는 것. 핵을 소유한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이 핵을 못 갖도록 하는 핵 패권을 행사해왔기 때문에 미국 역시 한국이 무기를 개발, 소유하려는 것을 묵과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26때 김재규가 쏜 총에 의해 피살된 이유를 18년 5개월간의 자기 집권, 독재를 거부한 민중들의 거센 반발 등을 주요 원인으로 꼽아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부로부터 미국이 반대하던 핵무기의 개발을 강행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주장들이 심심찮게 제기되고 있다.
미-소 양극 냉전 체제하에서는 핵무기가 세계를 움직이는 주요 전략 무기였기 때문에 미-소 양국은 여타의 나라들이 핵무기를 갖는 것을 환영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핵무기를 보유하려는 노력을 언제부터 시도했는지는 정확지 않다. 1970년 7월 이후에 한국에 주둔해오던 미 지상군 일부의 철수계획이 발표됐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의 조언에 따라 미지상군 1개 사단2만 명을 철수키로 했다. 이에 따라 1971년 3월에 미 제 7사단이 철수하고 제2사단만 남게 됐다. 박대통령의 핵무기 생산의지는 이를 전후로 표면화됐다.
1978년에 출간된 미 의회 국제관계위원회 산하 국제기구 소위원회(당시 위원장은 도날드 M 프레이저. 일명 프레이저 청문회로 통칭됨)의 한-미관계 조사보고서는 "1970년대 초반에 한국이 핵무기 개발 계획을 위해 몇 가지 조치들을 취했다는 표시가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내막은 무기개발위원회의 멤버였던 전 한국정부 고위관리와 가진 본 소위 조사위원 인터뷰에서 밝혀졌다. 그는 본 소위에서 무기개발위원회가 만장일치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고 얘기했다. 그 결과, 한국정부는 프랑스로부터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벨기에로부터 합성산화 연료처리 시설의 구입을 논의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 보고서는 "결국 1975년경, 한국의 모든 핵무기 계획은 취소되었고, 연료 재처리 시설의 구매 협상은 종료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적시하면서 "1974년의 외교적 노력(미국 정부)이 한국의 핵무기 생산에 대한 독자적인 조치를 봉쇄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히고 있다.
최형섭-선우진-김용태 증언
해외의 선진 이론-기술을 습득한 고급 두뇌를 유치하는데 공훈을 남긴(핵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인력도 포함) 최형섭 전 과학기술처장관(62년 원자력연구소장. 1966∼71년 과학기술연구소장. 1971∼78년 과기처장관)은 "당시 우리의 핵무기 제조 이론-기술 수준이 상당 수준까지 와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최형섭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해외의 고급 두뇌를 많이 유치하라고 지시했었다. 그 결과 1966년부터 1975년 6월말까지 과학기술연구소, 과학원, 원자력연구소 등의 연구 기관에 2백 5명의 고급 두뇌가 유치됐다. 이들은 어디에 내놓아도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 고급 두뇌였다”면서 “1970년대 핵무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이론적인 문제는 없었다. 이미 그 이론은 보편화돼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될 때까지 청와대 공보비서관을 지냈던 선우연은 핵무기와 관련된 고급 비밀을 공개, 박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의지가 어떠했으며, 어느 정도의 핵무기 개발기술에 접근했는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79년 1월3일 새해벽두, 박정희는 부산 해운대 비치호텔에서 서울에 있는 선우연 공보비서관을 긴급하게 불렀다. 그리고 해운대 백사장을 거닐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백사장 끝까지 걸어갔다. 선우비서가 "각하, 왜 그렇게 멀리 가십니까?"라고 묻자 "도청할지 누가 알아?(미국의 청와대 도청을 의식하는 말)라면서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자네에게 꼭 할 말이 있어 불렀네. 내가 1981년에는 그만 둘거야" "아직 할일이 많은데 어떻게 1981년으로 못 박으십니까?" "이유가 있어. 1981년 전반기에 핵폭탄이 완성된다고 국방과학연구소장 한테 보고 받았어. 핵폭탄이 생기면 김일성이도 감히 남침을 못할 거 아닌가. 북괴가 남침하더라도 우리가 핵을 던지면 북한도 날아갈 것 아닌가. 쳐내려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방어용이야. 1981년까지 완성이 되면 그해 국군의 날 여의도 행사를 부활시켜서 추기 사열할 때 원자탄을 세계에 공개 하겠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사퇴 성명을 내고 물러나는 거야" 박대통령은 이말이 극비라고 언급했다. 그래서 선우비서는 그날 들은 내용을 암호로 기록하여 의원회관 금고에 넣에 두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과 가까웠고 17년 의원 재임 기간 동안 줄곧 국방위원으로서 국방 관계 정보를 다뤄왔던 김용태(전 공화당 원내총무)는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박 대통령이 핵개발에 열정을 보였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김용태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의지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 정책에서 연유했다. 우리의 생존과 국가의 자위를 위해서는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해외에서 유치한 고급 두뇌를 대덕연구단지에 일반인들과 격리해서 살도록 하면서 기술 개발을 독려했다. 한 번은 박대통령과 함께 그 연구 단지에 갔었다. 연구진들은 박 대통령에게 무언가 개가를 올린 보고를 올렸다. 그때 박 대통령과 연구진은 부둥켜안고 울면서 기뻐하기도 했다. 아마 핵무기 개발에 대한 희망적인 결실이 아니었나 싶었다. 그 무렵 미국 정보기관 청와대를 도청하는 등 핵무기를 못 만들게 하는 방해 공작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주한미대사가 도청 가능성을 공식으로 말했는데 그 이유는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덧붙였다. 그뿐 아니라 내 고향이 대덕인데 미군측은 대덕연구단지의 상공사진을 수시로 찍어서 그 변화를 체크했었다”고 공개했다.
그는 “이와 관련한 고급 정보가 있으면 공개해달라”는 필자의 제안을 받고 “미국 정부는 비밀을 분류해서 공개하고 있다. 그 시기가 되면 우리나라에서 핵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공작 문서들이 공개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1970년대 세계의 언론들이 '한국 핵무기 개발 임박'이라는 보도를 자주 했음을 우리 국민들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문제를 가지고 남모르게 속을 태우신 분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분은 경제의 기적을 이루었고 또 다른 자국 안보의 집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마침내 강대국 관계와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어 '10.26사태'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면서 "국가의 안전을 보장하고 민족의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한반도 주변의 핵 세력을 우리가 조종할 수 있는 하나의 축이 되고자 했던 것이 그 분의 군사 전략이었다"고 술회했다.
핵 전문 학자인 김태우 박사는 "여러 나라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군사 안보적인 이유와 정치 외교적인 이유에서이다"고 언급하고 "우리나라에서 한때 핵무기 개발이 추진됐던 것은 미국의 카터 행정부가 주한 미군을 철수시킬 때 안보 대용물로 박대통령이 지시해서 추진되었던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김박사는 핵전문가로서 박 대통령에 대한 남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는 "대통령은 독재를 하는 등의 모든 잘못을 상쇄하고도 남을 핵정책을 폈다"고 평가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핵무기 제조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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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9월 3일 AP통신은 한국의 핵물질실험의혹을 보도하였다. 9월 17일 IAEA 이사회 의장 결정에 따라 9월 19일 IAEA사찰단이 입국하여 조사활동을 벌였다”고 전제하고 “우리 정부는 '문제의 우라늄 플루토늄 실험은 과학자들이 학문적 호기심에서 개별적으로 한 것이며 정부는 핵무기 개발은 물론 어떤 농축 및 재처리 프로그램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명하였으나, IAEA의장은 11월 24일 이사회까지 보고서 제출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전 변호사는 “2004년 9월 18일 노무현 대통령은 관계 장관들과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군사적 목적의 핵개발 계획을 추진하지 않았고 핵무기개발과 관련된 활동이나 교류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밝혔다. IAEA사무총장은 '심각한 우려(serious concern)'를 표명하였다. 일본은 '한국의 핵활동 미신고에 유의한다'고 반응하였으며, 미국은 IAEA가 한국의 핵안전조치협정 불이행을 판정할 경우 유엔안보리에 보고할 가능성을 지적했다”고 전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노출되지 않은 가운데 핵무기 제조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더 자세한 내용이 공개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한국 정부가 핵물질 실험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다. 이에 따라 IAEA사찰단이 입국, 강한 조사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노무현 역시 자살로 삶을 마감, 핵무기 제조 추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게 됐다. 이것 역시 분단 한국이 가진 구조적인 아픔이 아닐까?
최근 핵주권이라는 말이 국제사회 이슈로 등장해 있다.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 왔던 우리의 생존권을 위해서 미국의 핵우산과 병행한 우리의 핵 정책을 펴다가 살해당한 박 대통령의 핵정책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무기 제조 추진을 재평가해봐야 한다는 여론인 셈이다.
문일석 기자/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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