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세상

도심속 등대

daum an 2008. 9. 6. 23:17

도심속 등대
자유,민주,정의 3가지 기본정신이 담겨진 불빛

마산의  육호광장 로터리 부근 도심속 등대 조형물이 있어 야경의 아름다운 불빛을 마산 전역으로 빛을 발한다.한국의등대역사는 우리에게 불행한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도심속의 등대는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 · 민족운동으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빛이 아닐까 필자는 생각한다.

목욕탕의 굴뚝에서 두번의 리모델링 으로 "도심속의 등대" 조형물 형태로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등대는 항해용어로 해안에서 수심이 얕은 곳이나 육지쪽으로 망루를 세우고 불을 밝혀 항해에 도움이 되도록 만든 건조물 이다.

  
▲ 도심속 등대 마산 육호광장 로타리에서 바라본 "도심속 등대"
ⓒ 안기한
도심속등대

 

도심속 등대는 자유 · 민주 · 정의가 기본 정신이 담겨져 있는 4월혁명, 부마민주화운동, 6월항쟁, 5 ·18민중항쟁에 이르기까지 한 시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진행형으로 영원히 이어져야 되는것이다.

  
▲ 마산의 국립 315 민주 묘지 그들이 있었기에 민주주의 꽃이 피었다.
ⓒ 안기한
민주화운동

  
▲ 마산의 국립 315 민주 묘지 자유 · 민주 · 정의가 기본 정신인 3 · 15 민주화운동은 영원히 이어져야 할것이다.
ⓒ 안기한
3.15

 

등대(lighthouse)에 관하여 아래와같이 정리 해본다.

한국의등대역사는 우리에게 불행한시기에시작되었다.

일본의 술책과 강압에의한 시대적 산물로 등대가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 등대 항해하는 선박의 안전을 위해 빛을 발하는 등대
ⓒ 안기한
등대

1876년에 이루어진 강화도조약은 우리나라를 쇄국주의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한 사건이었다.그뒤 개항장을 드나드는 제국주의 침략세력은 이권을 먼저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용기를 얻은 일본은 개항장을 통하여 한일 양국간의 선박 왕래가 날이 갈수록 빈번해졌는데 한국 연해의 요소에 등대나 초표가 설치되지 않아 불편한 점이 많다며 등대건립을 촉구하는 외교문서를 보내온다.

또한 등대건설위치선정을 위한 측량선의 인천 도착 날짜를 통보하니 협조원을 보내라는 독촉도 하였으며 각 항구에 출입하는 상선으로부터 징수하는 관세를 등대건설에 충용하라는 제의도 하였다. 또한 러시아 영국으로부터도 비슷한 요구가 있었다.

등대의 효용성을 알고 있었지만 극심한 재정난으로 난감해 오던 우리 정부는 결국 열강의 강권에 못 이겨 1902년 인천에 해관등대국(海關 燈臺局)을 설치하고 그 해 5월부터 팔미도, 소월미도, 북장자(北長子) 등대와 백암(白岩) 등표(燈標) 건설에 착수해 1903년 6월에 이를 각각 완공하였다. 이것이 우리 나라 등대의 효시이다. 결국 우리 나라를 넘보던 열강들의 이양선(異樣船)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기 위한 바다의 이정표(里程標)로 등대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 우리나라 최초등대 "팔미도" 1903년 6월1일 팔미도 꼭대기(해발 71m)에 최초의 등대로 세워졌다.
ⓒ 안기한
최초등대

팔미도 등대는 우리나라 최초의 등대이다.

1901년 일본이 우리 정부와 체결한 ‘통상장정(通商章程)’에 “한국 정부는 통상 이후 각 항을 수리하고 등대와 초표(礁標)를 설치한다”고 한 조항을 들어 등대 건설을 강권함으로써 1903년 6월1일 팔미도 꼭대기(해발 71m)에 최초의 등대로 세워졌다. 소월미도 등대도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 등대는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팔미도 등대는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불을 밝힌 역사를 지니고 있다.극심한 간만의 차 등 여러 악조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영흥도를 중심으로 각종 첩보 활동을 펼쳤던 캘로 부대원들은 1950년 9월 10일 밤 발동선을 타고 들어가 팔미도 등대를 조사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북한군은 이 등대를 전혀 쓰지 않았는데, 조사해 보니 반사경의 전선이 끊어졌을 뿐 멀쩡하였다. 그들은 동경(東京) 유엔군 총사령부에 “필요하다면 등대를 켜 놓겠다”고 연락을 취했다. 동경에서는 “9월14일 밤 12시 정각에 등대를 밝히라”는 명령을 내렸다. 9월14일 밤,그들은 팔미도에 잠입해 등대에 불을 밝혔다. 이로써 수백 척의 함정들이 등대를 길잡이 삼아 팔미도 해역에 집결했고, 다음날 새벽에는 곧바로 장관을 이루며 상륙 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서해바다를 100년간 지켜온 팔미도 등대는 문화재로 보존되어 2003년에 새로운 등대가 세워졌다.해양수산부는 2002년 8월 등탑과 사무실이 같이 있는 연면적 187.5평 규모의 새 등대를 착공해 2003년 6월에 등대 100주년을 앞두고 완공할 계획하였다. 높이는 현재의 7.9m에서 23.6m로 높아졌고 광학적인 빛의 세기도 크게 강화돼 더 멀리서도 볼 수 있게 되었다.

관련자료 및 이미지 출처: 등대사랑